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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아지는 삶

작성자 사진: Lee JumanLee Juman

낮아지는 삶, 전도서 4:1-16


전도서는 해 아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헛되다고 말합니다. ‘헛되다’라고 번역된 말은 ‘숨, 입김’이라는 뜻입니다. ‘해 아래서’, 곧 오늘, 이 땅에서 우리는 살아가는데, 그 모든 삶이 마치 ‘숨’ 또는 ‘입김’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우리의 삶은 매우 짧고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죽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함께 우리가 수고하여 이룬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추운 날 숨을 쉬면 입김이 잠시 보였다 사라집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수고하여 이룬 것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는 날까지 숨을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해도 결국 허무하게 사라질 삶이라면 우리는 왜 살아야 할까요? 우리가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 아침 일찍 일어나 저녁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고 일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도서는 해 아래에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우리 삶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죽음은 그만큼 강력합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삶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허무주의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해 위에서, 즉 모든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해 줍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 전도서 4장의 내용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전도자는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습니다. 세상에는 끔찍한 학대들이 정말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갓난 아이를 잔인하게 학대하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힘 없고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를 학대하는 고용주도 있고, 가난한 나라에 공장을 지어 어린 아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학대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모든 학대의 공통점은 힘을 가진 자가 힘이 없는 자를 괴롭힌다는 것이고, 괴롭히는 목적이 자기의 이익과 만족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학대’의 근본에는 이기적인 자기 사랑이 있습니다. 자신이 왕이 될 수만 있다면 이웃은 얼마든지 불행해져도 괜찮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새번역 성경은 4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온갖 노력과 성취는 바로 사람끼리 갖는 경쟁심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나는 깨달았다. 그러나 이 수고도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그렇게 이루어낸 성취는 사람들의 경쟁심과 시기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해 아래 세상, 곧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타락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남들보다 더 좋은 학교에 가기 위해, 남들보다 더 좋은 직장에 가기 위해, 남들보다 더 인정받고 높아지기 위해 살아가는데, 그것은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이 헛됩니다. 거기서 우리는 어떤 만족도 기쁨도 얻을 수 없습니다.


전도자는 몇 가지 예를 들어 그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8절을 보면 어떤 사람은 아들도, 형제도 없고, 주변에 아무도 없이 홀로 있습니다. 왜 그런가 보니, 열심히 수고하고 일하느라 그랬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수고하고 일했는가 보니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중독에 빠져서 주변에 사람들을 돌아보지 못하고 어울리지 못하고,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만을 가까이하려 하였을테고, 도움이 되지 않으면 관계를 끊어버리니 어느 한 사람 그의 곁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쉼없이 일해서 돈은 많이 벌었지만, 정작 그 안에 기쁨이 하나도 없고 고독합니다. 가장 비싼 차를 타고 최고급 호텔의 가장 좋은 방에서 호화롭게 있는데, 외롭고 불행하다는 생각뿐입니다. 물론 돈만 주면 자기의 비위를 맞춰줄 많은 사람들과 함께 파티를 즐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속으로 다 알지요. 그들은 그저 돈 때문에 있는 것이지 정말 나를 사랑하고 이해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또 다른 예는 13절에 나옵니다. 두 사람이 있는데요,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소년과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 않는 나이가 많은 왕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노인은 지혜의 대명사였습니다. 잠언에도 보면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잠 16:31),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잠 20:29)라고 말했습니다. 백발이 된 어른들의 지혜와 경륜이 그만큼 아름답고 존경할 만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모든 노인이 다 지혜로운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 즉 자기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자기 중심성, 자기 사랑에 빠져 살아온 사람은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어리석고, 반면 가난하고 소년이라도 충분히 지혜로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도자는 학대하는 자, 일중독에 빠진 자, 간언을 듣지 않는 늙은 왕의 모습을 통해 이기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얼마나 다른 사람에게 고통과 해를 끼칠 수 있는지, 동시에 자신을 얼마나 고독하고 불행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오랜 세월을 살아도 어리석고 미성숙한지를 그려냅니다. 이러한 예가 너무 극단적인 것처럼 생각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의 이익과 만족과 성공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경쟁 상대로, 수단으로 생각하게 되고, 그런 우리의 삶은 이웃을 학대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파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전도자가 우리에게 주는 대안은 무엇일까요?


첫째, 욕심을 버리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6절은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무엇을 더 얻어야, 무엇을 더 해야 행복할 것이고, 성공할 것이라는 착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삶을 주신 목적은 무엇을 더 많이 얻고 성취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삶이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누리는 것이 만족입니다. 만족하지 못하고 두 손 가득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을 학대하며 쉼 없이 일하는 삶은 마치 바람을 잡으려고 열심히 수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헛된 일입니다.


둘째, 이웃을 돌아보고 함께하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세상에는 학대를 당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이 정말 불행한 까닭은 위로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진정으로 학대를 받는 자들을 위로해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진정한 위로자는 오직 “자비의 아버지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고후 1:3)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4).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른채 경쟁적이고 이기적인 사회에서 학대당하고 소모품처럼 취급당하는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그들에게 진정한 위로를 줄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학대 받는 자는 있는데 위로자는 없다는 말은, 참된 위로자를 알고 그 위로를 얻은 우리로 하여금 위로자이신 하나님을 전하여 그들도 이 위로 안에 있게 하도록 요청합니다.

9-12절은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고,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성공과 성취를 쫓는 삶은 혼자 사는 삶이라면, 이웃을 돌아보는 삶은 함께 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시며 여자를 창조하셔서 부부가 되게 하셨고, 그 사이에서 많은 자손을 낳게 하셨습니다.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두 사람보다 세 사람, 즉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사랑하고 돌보며 어울려 살아가는 삶이 정말 가치 있고 행복한 삶입니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은 유한하다는 사실, 곧 우리는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전도서의 일관적인 주제입니다. 14-16절을 보면 가난하고 지혜로운 소년의 이야기가 이어지는데요, 마치 요셉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지혜로, 요셉이 총리로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보존하고, 요셉의 통치 아래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자 더이상 요셉은 기억되지 않았고, 환대를 받던 그의 민족은 노예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섬기고 이룬 모든 것이 헛되게 돌아간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은 죽음 앞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삶을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영원에 잇대어 있기에 결코 헛되지 않은 삶이 될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을 ‘낮아지는 삶’이라고 붙였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은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고 왕이 되기 위해 살아가는 삶입니다. 수고하고 노력해서 더 많이 얻고, 더 많이 성취하기 위해 사는 것, 이런 삶은 높아지기 위해 사는 삶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의 삶은 하나님과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사랑하는 삶입니다. 이웃을 돌아보고 사랑하려면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위해, 이웃을 위해 더 많이 나누고, 더 많이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낮아지는 삶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되시는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렇게 낮아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 영광을 버리고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신 이유,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심으로 우리는 헛되고 소망 없는 세상 속에서 영원한 생명과 참된 소망과 위로를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 주님께서는 이 십자가의 길을 통해 영광에 이르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높은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사랑과 섬김의 길로 가는 것, 곧 낮아지는 삶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높아지기 위한 것입니까? 그 길의 끝은 절벽입니다. 높이 올라간 끝에 추락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처럼 자신을 낮추어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길은 점점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길이지만, 놀랍게도 그 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의 삶이 더 높아지기 위해 허비하는 삶이 아니라 더 낮아지기 위해 나누고 섬김으로 더욱 주 안에서 풍성해지는 복된 삶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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