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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Lee Juman

마르부르크 회담(1)

최종 수정일: 2023년 10월 21일

마르부르크 회담(Marburg Colloquy, 1529)


마르부르크 회담은 당시 종교개혁 진영을 양분하고 있었던 루터파와 개혁파의 신앙의 일치를 위해 함께 모여 토론했던, 역사적으로 매우 뜻 깊은 사건입니다. 양측 신학을 대표하는 학자들, 특별히 마르틴 루터와 츠빙글리가 직접 만나서 토론했던 유일한 회담이었기에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이 회담의 결과로 작성된 15개의 조항을 가리켜 마르부르크 조항이라 하는데, 14개 조항에서 신학적 일치를 이루었지만, 마지막 15조항, 곧 성찬에 관한 문제에서 일치를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마르부르크 회담은 신앙의 일치를 위해 모였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회담을에서 유익을 얻을 수 있는데요, 초기 종교개혁자들이 함께 동의했던 내용과(통일성) 의견의 차이를 보였던 내용이(다양성)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르부르크 회담은 단순히 신앙적 이유로만 열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치적 이유가 더 크게 작용하였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회담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먼저 회담이 열리게 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정치적, 신학적 목적과 경과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후에 회담의 결과로 작성된 마르부르크 조항의 내용을 통해 초기 종교개혁자들이 동의했던 신학적 내용을(통일성)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회담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성찬 논쟁을 통해 개혁자들이 어떤 부분에서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차이를 드러냈는지를(다양성) 생각해 봅시다.


1. 마르부르크 회담의 역사적 맥락


1529년, 독일과 스위스의 개신교 최고 지도자들이 헤센의 방백 필립(Landgraft Philipp von Hessen)의 초청으로 마르부르크 성에 모여 4일 동안(10월 1~4일) 회담을 가졌습니다. 이 회담은 제2차 슈파이어 제국회의(1529)에서 처음 개신교(protestant)로 불려진, 종교개혁 신앙을 가진 이들의 신학적, 정치적 일치를 목적으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회담은 처음부터 순수한 신학적 목적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으로 소집되었습니다.


1.1. 마르부르크 회담의 목적

헤센의 필립은 1529년 마르부르크 회담을 소집할 때,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신학적 목적으로 루터와 츠빙글리와 외콜람파디우스의 성만찬 논쟁을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두 번째는 정치적 목적으로 제2차 슈파이어 제국회의(1529)의 결과로 개신교 제후들의 동맹을 형성하려고 했습니다.


(1) 신학적 목적 : 1525년부터 루터와 개혁파 사이에 출판물을 통해 성찬 논쟁이 일어납니다. 1525년 츠빙글리는 [성찬에 관하여]라는 책을 출판하고, 외콜람파디우스도 [주님의 참된 말씀에 관하여]라는 책을 출판하여 성찬에 대한 입장을 밝히며, 루터의 견해를 비판했습니다. 1527년 루터는 [“이것은 나의 몸이다”를 비롯한 그리스도의 말씀들은 광신주의자들에 맞서서 여전히 견고히 서 있다]라는 긴 제목의 논문을 통해 츠빙글리의 주장에 반대했습니다. 논쟁의 내용은 이후 성찬 논쟁을 다룰 때 좀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이 논쟁의 핵심이 “성찬에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는 사실과 이 논쟁이 매우 치열하였다는 것을 기억하는 정도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2) 정치적 목적 : 마르부르크 회담의 두 번째 동기는 1529년 제2차 슈파이어(speyer) 제국회의의 결과와 관련이 있습니다. 1521년 유명한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루터가 정죄되면서, 루터의 글에 대한 출판과 독서가 금지되고, 루터를 가까이하거나 호의를 베풀지 말고 발견하면 사로잡거나 신고해야 한다는 보름스 칙령이 반포됩니다. 그런데 1526년에 열린 제1차 슈파이어 제국회의에서 “제후의 종교가 곧 그 나라의 종교가 된다”(cuius regio, eius religio)라고 선언하면서 보름스 칙령은 사실상 취소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1529년 제2차 슈파이어 제국회의에서 이 선언을 다시 뒤집어서 보름스 칙령대로 시행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미 종교개혁 신앙을 받아들인 6명의 제후들과 14개의 고지독일 제국도시들은 이 결정에 반대하여 저항권(Protestation)이라는 법적 수단을 사용하였고, 이를 계기로 저항파(개신교, Protestant)라고 불리게 됩니다. 이틀 후(4월 22일) 선제후령 작센, 헤센, 뉘른베르크, 스트라스부르, 울름이 비밀리에 황제에 반대하는 정치적 보호동맹을 체결합니다. 이 동맹의 고안자는 헤센의 필립과 스트라스부르의 야콥 슈투름이었습니다. 구교측을 규합하는 황제로 인해 개신교측은 직접적인 전쟁의 위협을 받게 되었고, 필립은 전체 개신교 동맹을 만들고자, 가능한 제국 외부의 세력들도 끌어들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동맹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성찬 논쟁’이었습니다. 카터 린드버그라는 교회사가는 “그리스도인의 연합을 나타내는 성찬이 기독교 역사의 다양한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묶기 보다는 분열시킨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일종의 비극적인 역설이다”라고 말했는데요, 어느 정도 수긍이 됩니다.


마르부르크 회담의 두 가지 목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1) 전체 개신교 동맹을 만들기 위해 (2) 서로 나뉜 성찬에 대한 입장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1.2. 마르부르크 회담의 경과

마르부르크 회담이 정치적인 의도를 가진 종교 대화였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입장이 신학적 대화에서 큰 역할을 한 것에 대해서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대의 개혁자들은 정치적인 배려를 위해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굽히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 회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살펴볼까요?


(1) 회담 외부의 정치적 경과 : 헤센의 필립은 양분된 개신교를 하나로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비텐베르크(루터)와 취리히(츠빙글리)를 잇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더욱 어려운 점이 있었는데, 선제후령 작센이 명백히 다른 노선으로 빠진 것입니다. 회담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제후 논의가 열렸습니다(10월 3-7일). 작센의 선제후는 슈파이어에서 헤센과 스트라스부르의 강청에 즉흥적으로 동맹 계획에 동의하였지만, 정치적 상황을 계산한 후에는 황제에게 반대하는 저항권 행사에 망설이게 되었고, 결국 계획된 동맹을 거절합니다. 작센은 동맹의 바운더리를 루터파 신앙을 따라는 제국도시로 제한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작센의 정책은 비텐베르크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루터는 신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회담에 적극적일 이유가 없었고, 멜랑흐톤이 회담 내내 침묵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텐베르크(작센)는 동맹도, 신학적 일치도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2) 회의 내부의 신학적 경과 : 마르부르크 회담과 결정된 조항의 내용을 볼 때,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회담의 내용과 결정된 조항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회담에서 공적으로 나눈 대화 내용의 대부분은 성찬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 조항들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작성되어 합의를 이루게 되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헤센의 필립은 신앙의 교리를 전체적으로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사실 비텐베르크 신학자들은 성찬 문제를 논의하기 전에 다른 신앙 조항들에 관하여 의논하길 원했습니다. 스위스와 스트라스부르에서 복음에 반하는 잘못된 교훈이 가르쳐 진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위스 개혁자들의 입장에서는 얼토당토않는 말이었기에 이 비난을 인정하지 않았고, 따라서 성찬에 관한 문제만 다룰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 결과 회담에서는 오직 성찬 문제만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회담 첫 날(10월 1일)은 루터와 외콜람파디우스, 츠빙글리와 멜랑흐톤의 양자회담으로 진행되었고, 둘째 날(10월 2일)부터 본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3일 오후까지 대화는 성과없이 진행되었고, 마지막 날인 4일, 필립은 루터에게 모든 신앙 조항들의 목록을 작성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비록 성찬에 대한 대화는 실패하였지만, 그 외의 다른 신앙의 조항들에 있어서는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루터는 여전히 스위스 개혁자들에 관하여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들은 루터가 작성한 조항에 동의한다고 서명함으로 인해 필립의 의도는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1.3. 마르부르크 회담의 결과와 의의

마르부르크 회담은 종교개혁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종교개혁 초기 가장 권위 있는 신학자들이 함께 모인 이러한 회의는 전무후무했기 때문입니다. 아쉬운 것은 회담의 결과가 좋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성찬 문제는 여전했고, 의도했던 동맹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점도 있습니다. (1) 마르부르크 회담의 직접적 결과물인 마르부르크 조항, 14개 조항에서 일치를 확인하였고, 성찬에 관하여서도 모든 부분에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님을 확인하며, 0.5개 조항의 차이를 확인하였다는 것입니다. (2) 헤센의 필립은 마르부르크 회담을 통해 부처를 알게 되었고, 이후 부처는 필립의 중요한 신학 조언자가 됩니다. 이후 필립과 부처는 1536년 비텐베르크와 고지독일 도시들의 신학적 일치를 이끌어내게 되었고, 그 결과 고지독일의 제국도시들이 로마 가톨릭 세력에 맞서는 개신교 동맹인 ‘슈말칼덴 동맹’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당장 원하던 동맹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슈말칼덴 동맹에 이 회담이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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