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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Lee Juman

마르부르크 회담(2)

2. 마르부르크 조항 해설


2.1. 회담의 진행 과정 및 조항의 작성

10월 1일, 루터와 외콜람파디우스, 츠빙글리와 멜랑흐톤의 양자회담이 열렸습니다. 본격적인 회담에 앞서 중도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들이 각 진영의 강경한 인물들과 대화하도록 한 것이지요. 일치를 이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지혜였습니다. 10월 2일, 공식적인 회담이 시작되었고, 성찬에 관한 주제로만 대화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10월 3일 오후까지 아무 성과가 없었습니다. 10월 4일, 빈손으로 회담을 끝내고 싶지 않았던 필립은 루터에게 신앙의 조항들을 작성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비록 성찬에 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이루지 못했지만, 전체적인 신학적 입장에 있어서는 서로의 견해가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하여서, 일종의 일치와 유사한 결과물을 내고자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루터에 의해 조항들이 작성되었고, 몇 가지 변경사항을 수정을 통하여 아주 짧은 시간에 일치를 보았습니다. 이렇게 15개 조항으로 된 마르부르크 조항은 14.5개의 일치된 조항과 0.5개의 불일치된 조항으로 구성되게 됩니다.


2.2. 마르부르크 조항 해설

이제 마르부르크 조항(Marburg Articles )의 각 조항을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초안을 작성하였기 때문에 이 조항들은 루터의 신학적 성향이 잘 드러나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는데요, 츠빙글리를 비롯한 개혁파가 작성 과정에 참여하면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고대 보편신조를 따르는 삼위일체론과 기독론(1-3항)

첫째, 우리 양측은 다음 내용을 일치하여 믿고 참된 것으로 여긴다. 유일하고, 참되고, 실재하는 모든 만물의 창조자이신 한 하나님이 계신다. 이 하나님은 그의 본질과 속성에서 하나이고, 위격들에서, 즉 아버지, 아들, 성령, 삼위로 계신다, 등등. 이것은 온 세계 전체 기독교회 가운데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되고, 니케아 신경에서 노래되고, 읽혀지는 것과 같다.
둘째, 우리는 다음과 같이 믿는다. 아버지나 성령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참되고 실재하는 하나님이 성령의 일하심을 통해 사람이 되셨다. 그는 사람 씨의 도움 없이 순결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그는 완전한 육체적 형상으로 육체와 영혼으로 태어나셨고,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육체와 영혼을 가지셨다. 그러나 죄는 없으셨다, 등등.
셋째, 하나님과 마리아의 아들, 분리되지 않는 위격,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죽으셨고, 묻히셨다.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하늘에 올리셨다. 그는 모든 피조물의 주인으로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모든 피조물의 주로서, 후에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등등.

1-3항은 기본적으로 고대 공의회와 거기서 작성된 보편신조의 내용에 기초하여 서로의 신앙을 확인합니다. 눈에 띄는 표현은 ‘등등’(etc.)입니다. 더 말할 것이 많이 있지만,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1항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견해를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381)의 내용으로 확인하였고, 2항은 칼케돈 신조를 따라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완전한 신성과 인성, 그리고 무죄성을 고백합니다. 3항도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기초합니다. 루터에게 중요한 표현은 “분리되지 않는 위격”입니다. 루터에게 있어 고난받고 죽임당하신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지 않는 위격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반면 츠빙글리는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따라서만 고난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견해의 차이에 관하여 세부적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등등’으로 뛰어넘습니다. 성찬 문제와 달리 이 부분을 쉽게 넘어간 것이 의아하게 생각되는 부분입니다.



(2) 종교개혁의 복음, 구원론(4-7항)

넷째, 우리는 다음을 믿는다. 원죄가 아담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졌고, 유전된다. 원죄는 모든 사람을 정죄하는 죄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으심과 생명으로 우리를 돕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영원히 죽어야 했고, 하나님 나라와 복에 이를 수 없었을 것이다.
다섯째, 우리는 다음을 믿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우리는 이 죄와 모든 다른 죄에서,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된다. 그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등등. 그리고 우리는 믿음 없이, 어떤 행위나, 계급이나 수도원 등을 통하여 영원한 죄에서 자유롭게 될 수 없다, 등등.
여섯째,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믿음을 선행하는 행위나 공로로 얻을 수 없고, 또한 자신의 능력으로 만들어 낼 수도 없다. 성령께서 원하실 때, 우리가 복음이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오직 성령께서 믿음을 우리 마음에 주시고 만드신다.
일곱째, 이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우리를 의롭고, 경건하고, 거룩하다고 간주하시고, 어떤 행위나 공로 없이 우리를 이를 통해 죄와 죽음과 지옥에서 돕고, 우리를 은혜롭게 받으시고, 그의 아들로 인하여 복되게 만드신다. 우리는 아들을 그렇게 믿고, 그것을 통해 의와 생명과 그의 아들의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리고, 그것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의를 위해 쓸모 있다고 여겨지는 모든 수도원의 삶과 수도사 맹세는 완전히 정죄된다.

4-7항은 죄인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는 일, 곧 우리의 구원에 관한 내용입니다. 복음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생각을 보여줍니다. 복음에 관한 내용에 있어서 종교개혁자들은 이견 없이 일치하였습니다. 인간의 행위와 공로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는 점에서 양측은 로마가톨릭교회와는 분명하게 다르고, 서로에게서는 분명한 일치성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3) 성령님의 선물로서 믿음, 설교와 세례(8-9항)

여덟째, 성령은, 보통의 경우에, 어느 누구에게도 이 믿음이나 선물을 그리스도에 대한 선행하는 설교나 구두로 전해지는 말씀 없이 혹은 복음 없이는 주지 않는다. 오직 성령이 믿음에 영향을 주고 만드신다. 그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사람에게서, 구두로 전해지는 말씀을 통해, 말씀과 함께(롬 10:17) 주신다.
아홉째, 거룩한 세례는 성례이다. 하나님에 의해 믿음을 위하여 제정되었다. 그리고 “가서 … 세례를 베풀”(마 28:10)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막 16:16)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세례는 그리스도인들의 표지 혹은 표시일 뿐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요구되는 하나님의 표적과 일하심이다. 이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

8항에서 루터와 츠빙글리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루터는 성령님께서는 선포된 말씀 없이는 믿음을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복음의 선포가 성령님의 역사보다 선행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츠빙글리는 성령님의 역사가 말씀에 선행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안에 믿음을 주시는 분은 말씀이 아니라 성령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둘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해 일하시는 것이 통상적인 질서라는 것에 동의하였습니다.


루터가 강조하는 것은 외적인 것(설교와 성례)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외적인 것, 곧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성령과 믿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은 성찬 논쟁에서 루터가 왜 그렇게 그리스도의 몸(인성)이 빵과 포도주에 임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루터에게 성찬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온전한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의 몸이 임한 것으로, 복음의 말씀이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선포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있는 곳에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 믿음을 주시고 구원하시기 때문에, 루터는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이 임하는 것을 그렇게 강조한 것입니다.


반면 츠빙글리는 기본적으로 말씀보다 성령님이 먼저라고 주장합니다. 믿음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4) 신자의 삶에 관하여(10-14항)

열째, 그러한 믿음은 성령의 일하심을 통하여, 우리가 성령의 일하심을 통해 바르고 거룩하게 여겨지고 그렇게 변화할 때, 이 믿음은 우리로 선행을 행하게 한다. 즉 이웃 사랑, 하나님께 기도, 모든 종류의 핍박과 고난을 받는 일 등등.
열한째, 고해 혹은 자신의 목사 혹은 이웃에게 상담하는 것은 강제 없이 자유롭게 행해져야 한다. 슬퍼하고 불안한 혹은 죄로 눌린 혹은 잘못 가운데 빠진 양심에게 매우 유용하다. 무엇보다 복음의 사죄 혹은 위로 때문이다. 복음의 사죄가 참된 사죄이다.
열두째, 모든 정부와 세상 법과 법원 혹은 규범들은, 그들이 존재하는 곳에서, 정당하고 좋은 것이고, 금지되지 않는다. 많은 교황주의자들과 재세례파들이 가르치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그곳으로 부름받고, 태어나서, 다른 것 없이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하여 복되게 될 수 있다, 등등. 동일하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정에서, 남편과 아내의 상황에서, 등등.
열셋째, 영적 혹은 교회의 문제에서 전통이나 사람들의 규범들이라 칭해지는 것은, 명백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반대하지 않는 한, 자유롭게 준수되거나, 중지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과 우리가 관계하는지에 따라, 우리는 그 규범들을 항상 불필요한 불쾌감을 갖지 않도록 지킬 수 있고, 사랑으로 약한 자와 모두의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다, 등등. 우리는 또한 성직자에게 결혼을 금지하는 교리는 악마의 교리라고 믿는다.
열넷째, 유아세례는 합법적이다. 유아는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기독교로 받아들여진다.

선행은 구원하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우리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 우리로 선한 일을 행하게 합니다. 로마가톨릭교회에서와 같이 죄의 고백이 강요되지 않지만, 자유롭게 행해질 때 우리의 양심에 유익한데, 이 유익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자에게 약속된 복음의 용서와 위로에 있습니다. 세속 정부에 관한 입장은 특별히 로마가톨릭교회와 재세례파에 반대하는 것인데, 교황주의자는 세상 정부를 교회의 권위 아래 두려 하고, 재세례파는 세상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분리된 삶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어떤 정부 아래에 있든지 상관 없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복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정부와 법과 규범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유롭게 살되 이 자유는 이웃을 위한 사랑과 덕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합니다.



(5) 일치하지 못한 주제, 성찬(15항)

열다섯째, 우리 모두는 우리의 사랑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에 대하여 다음을 믿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두 가지 형태(빵과 포도주)가 사용되어야 한다. 또한 미사는 죽거나 살아있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은혜를 얻는 행위가 아니다. 또한 제단의 성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의 성례이며, 이 몸과 피를 영적으로 누리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히 필요하다. 말씀과 동일하게 성례를 사용하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고, 명령된 것으로, 약한 양심이 성령을 통해 믿음으로 움직이도록 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 우리가 이번에 일치하지 못한 것은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참된 피가 육체적으로 빵과 포도주 안에 있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그럼에도 각 파는 양심이 허락하는 한, 다른 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야 한다. 그리고 두 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의 영으로 바른 이해를 확인하도록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루터가 밝히는 것처럼, 성찬에서 일치하지 못한 것은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참된 피가 육체적으로 빵과 포도주 안에 있는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이 주제에 관하여서는 다음 시간에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3. 14.5개의 일치와 0.5개의 불일치가 주는 의미


루터파와 개혁파는 성찬에 관하여 치열하게 토론하지만, 결국 합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렇게 마르부르크 회담은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서로의 다름만을 확인한 채로 회담을 마치지 않았습니다. 분명 서로 합의하지 못한 부분이 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부분에서 서로가 같은 신앙의 내용을 믿고 고백하고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분명 다양성이 존재하지만 걸어가는 방향에 있어서 루터파와 개혁파는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종교개혁 안에는 이렇듯 다양성과 통일성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함께 신앙을 고백하며 한 교회를 이루는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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