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읽고 묵상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말씀을 잘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은혜 주시길 기도합시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본문을 읽고 난 후 아래 해설을 읽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아벨의 제물은 기쁘게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거절하셨나요?
4장은 ‘예배’로 시작합니다. 타락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류의 역사는 비극적이었지만, 놀랍게도 성경은 에덴동산 밖에서의 첫번째 사건을 예배로 소개합니다. 사람은 타락하기 전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제 사람은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했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제사의 방법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올바른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우리가 궁금한 것은, “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시고, 가인의 제물을 거절하셨는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예배가 있고 거절하시는 예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오늘날 예배를 드리는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인데요. 사람들은 내가 예배하면 하나님은 당연히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과 태도는 예배의 중심이 현저히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인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예배를 거절하셨을 때 가인이 분노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나의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시고 가인의 제물은 거절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히브리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은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아벨과 가인의 차이는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아벨과 가인의 차이를 ‘믿음’이라고 본 이유는 무엇일까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히 11:6). 가인의 제사는 믿음 없는 제사였습니다. 믿음이 없이 예배할 수 있단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없다는 말은 단순히 불신앙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믿음의 반대말은 불신이 아니라 율법 혹은 행위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 의’, ‘자기 노력’을 의미합니다. 가인의 제물은 땅의 소산이었는데요. 땅의 소산은 기본적으로 많은 정성과 노력이 있어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가인의 제사는 정성과 열심이 부족한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인이 분노한 이유였지요. 한 해 동안 열심히 수고하고 노력해서 얻은 소산을 제물로 가져왔는데, 어떻게 이 제물을 받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아벨의 제사는 기쁘게 받으셨으면서 말이지요.
가인의 제사가 믿음이 없는 제사였음은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거절하신 이후에 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가인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면 하나님의 거절에 대해 분노하기 보다는 자신의 부족함이 무엇인지를 찾으려 했을 것입니다. 신앙을 ‘자기 의’, 노력, 정성, 열심으로만 생각할 때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섬겼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에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라고 하나님께 분노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율법주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는 우리의 정성과 수고와 노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들은 귀하고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는 여부가 나의 열심과 정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대로 예배하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두 후손 이야기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것은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일어난 최초의 싸움이었습니다. 가인은 땅에서 저주를 받아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벌을 받습니다. 16절은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주하였다고 말합니다.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류는 하나님의 뜻대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자기의 세상을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가인이 쌓은 성 ‘에녹’이 그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라멕은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죄인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라멕은 두 명의 아내와 결혼하는데요. “둘이 한 몸을 이루라”(창 2:24)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입니다. 라멕이 두 아내를 통해 낳은 자녀들은 탁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예술과 과학 등 문명이 발전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공하는 탁월한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경건한 삶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한 명의 여자를 창조하셔서 아담과 혼인하게 하신 이유가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함이라’(말 2:15)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경건한 가정에, 경건한 후손들을 허락하십니다.
가인의 후손들의 이야기는 라멕의 노래로 끝납니다. 라멕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내가 죽였다”고 노래하며 “가인을 위해서는 벌이 7배인데, 나를 위해서는 77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가인에게 아벨의 복수를 하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에게 7배의 벌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지요(15절). 아직 국가와 법이 생기기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사적인 복수를 금지하심으로 인류가 번성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라멕은 자신에게 작은 상처를 입힌 사람에게 자신은 살인으로 보복하였으면서도, 자신에게 보복하려는 자들은 하나님께 77배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잘못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은 타락한 인간은 더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이렇게 가인의 후손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취소되거나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인들로 가득한 세상 속에도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미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고 하와에게 아벨을 대신하는 다른 후손을 주십니다. 여자의 후손이 중단되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셋은 에노스를 낳았는데, 에노스에 대한 기록은 한 가지입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표현은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의미를 가진 관용적 표현입니다. 어제 주일예배 설교에서 한 사람의 인생은 길지만 죽은 후에 그의 삶은 짧게 요약된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에노스의 삶이 그렇습니다. 에노스의 삶은 예배자의 삶이었습니다. 여자의 후손을 대표하는 아벨과 에노스의 공통점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였음을 기억하십시오.
아벨의 이름의 뜻은 ‘허무함’이고, 에노스의 이름의 뜻은 ‘약함’입니다. 뱀의 후손들은 강하고 번성합니다. 여자의 후손들은 허무하고 약하지요. 허무하고 약한 인생이기에 하나님만 의지하고 신뢰하는 사람들이 바로 신자입니다. 세상은 자신의 강함과 성공을 자랑하지만, 성도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합니다. 하나님이 은혜가 우리에게 충분하고, 연약한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강한 능력으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고후 12: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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