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읽고 묵상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말씀을 잘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은혜 주시길 기도합시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본문을 읽고 난 후 아래 해설을 읽습니다.
언약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모세가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구했고,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33:18-19). 출애굽기 34장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신 내용을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돌판 둘을 깎아 만들어서 다음날 아침에 시내 산으로 올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처음 돌판에 새겨주신 율법의 말씀을 이 돌판에 다시 새겨주십니다. 깨어진 언약이 다시 회복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반포)하십니다.
(1)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 : 하나님께서 모세의 앞을 지나시며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6절).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십니다. 또 인자와 진실이 많으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오래참으시는 것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을 알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진멸하여도 결코 할 말이 없는 큰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셨지만, 노를 더디하시며 참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에 힘입어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지요.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컨대 주는 우리 중에서 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로 주의 기업을 삼으소서”(9절). 모세는 이스라엘이 목이 곧은 백성이고, 계속해서 범죄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시길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선하신 분,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분,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 질투하시는 하나님 : 선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다시 언약을 세우십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의 거민들과 언약을 세우지 말고, 그 땅의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우상숭배한 것은 혼인식날 간음을 저지른 것과 같은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음행한 이스라엘을 용서해주셨지만, 다시는 이와같이 음란하게 우상을 섬기면 안 된다고 강조하여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질투의 하나님”이라고 밝혀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에 관한한 매우 질투심이 많은 신랑이라는 사실을 신부의 마음 속 깊이 각인시켜 주십니다. 이것은 자칫 ‘크신 하나님께서 속이 좁으신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오해와 수치를 감수하면서까지 낮아지셔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시며, 우리도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해주십니다.
18-2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들이 지켜야 할 것을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십니다. 언약을 깨뜨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의 말씀의 의미를 가슴 깊이 새겨주시기 위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실천되어야 하는 율법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중요한 원칙들을 다시 말씀해주시는데요. 간략히 정리하면 그것은 예배와 안식일과 헌상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들이 언약 백성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얼굴을 가린 모세
모세는 하나님과 함께 사십 일을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와 능력으로 모세의 생명을 보존하신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는 음식과 물을 공급하셔서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시지만, 우리의 생명은 음식과 물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먹을 것이 풍족하다고 우리의 생명이 안전하게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두 돌판을 들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두 돌판에는 하나님께서 새겨주신 언약의 말씀, 곧 십계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모세에게 말씀하셨을 때, 그 영광의 광채가 모세의 얼굴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신 것은, 이 말씀을 듣는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영광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지요. 모두가 모세의 얼굴에 나는 광채로 인해 모세에게 가까이 오지 못합니다. 모세가 아론과 지도자들을 불러 말하고, 그제서야 백성들도 가까이 나아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백성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말을 마친 후에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 말씀을 들을 때 수건을 벗었고,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한 후에 다시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사도바울은 모세가 백성들 앞에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이유가 ‘백성들이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고후 3:13)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이란 지금 모세의 얼굴에 있는 광채를 말하지요. 그 광채는 하나님과 만나고 나올 때 생겼지만, 시간이 지나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수건은 모세의 광채를 가리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모세의 광채가 사라져 버리는 과정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얼굴의 광채가 사라지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백성들의 두려움도 사라져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야 겨우 율법을 지킬 수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연약함을 보여줍니다.
사도바울은 이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에게는 모세보다 더 나은 중보자가 있음을 말합니다. 즉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영원한 영광 가운데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성령님으로 인해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가 아니라, 그분을 향한 사랑으로 자유롭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영광스러운 새 언약, 곧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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