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읽고 묵상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말씀을 잘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은혜 주시길 기도합시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본문을 읽고 난 후 아래 해설을 읽습니다.
음식에 관한 규례
레위기 10장 10절에 의하면 제사장의 직무는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서 거룩하고 속된 것,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는 법이 11-15장에 나옵니다. 이를 정결법이라고 말하는데요. 정결법은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들도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
오늘 레위기 11장을 보면 여러 짐승들을 두고 어떤 짐승은 정하고 어떤 짐승은 부정한지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정결한 짐승은 먹을 수 있는 짐승이고, 부정한 짐승은 먹을 수 없는 짐승이었기 때문에, 음식 규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1-23절은 짐승을 네 종류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1-8절은 육지 짐승에 대해서, 9-12절은 물속에 있는 짐승에 대해서, 13-19절은 새들에 대해서, 20-23절은 기어다니는 곤충에 대해서입니다.
육지 짐승의 경우 먹을 수 있는 정결한 짐승은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을 하는 것입니다. 물 속에 있는 짐승의 경우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이 정결한 짐승입니다. 새의 경우는 가증히 여겨야 것들을 목록으로 보여주는데, 주로 시체에 앉아서 먹는 맹금류입니다. 곤충의 경우는 날개가 있고 기어다니는 것은 부정하지만, 뒷다리가 있어서 뛸 수 있는 것은 정결하고 먹을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렇게 나누는 근거는 뭐지?” 이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들이 있는데요. 제가 보기에 가장 설득력 있게 생각되는 해석은, 타락한 세상과 직접 접촉하느냐 접촉하지 않느냐에 따른 구분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하셨지만 인간의 타락과 함께 세상도 함께 타락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굽이 있는 동물은 마치 신발을 신은 것처럼 발바닥이 직접 땅에 닿지 않습니다. 그걸 정결하다고 한 것이지요. 물 속에 있는 짐승의 경우는 비늘이 마치 옷 같은 역할을 하기에 정결하고, 곤충의 경우는 기어다니는 것보다 뛰어 다니는 것이 땅에 덜 접촉하기 때문에 정결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은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분하는 기준이 어떻게든 죄와 타락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정결하고 부정한지 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께서 이렇게 구별하셔서 나타내고자 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실 때 하신 말씀에서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언약을 맺으신 이유는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출 19:6). 그래서 11장의 결론 부분인 44-45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셔서 먹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인들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의 정체성을 지키고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우리는 더이상 음식으로 우리의 거룩함을 나타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음식법이 주는 교훈은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교회에 있을 때만 세상과 다른 거룩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도 거룩함을 추구하고 드러내야 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갑시다.
24절부터는 이런 일반적인 규례 외에 추가적인 문제를 다룹니다. 즉, 살아 있을 때 정결하고 부정한 것과 상관없이 죽은 짐승은 부정합니다. 그래서 사체를 만진 사람도 부정하게 됩니다.
음식에 관한 규례를 주신 이유
하나님께서 이러한 음식법을 제정해 주신 이유와 목적은 무엇일까요? 45절이 잘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 놔두지 않으시고, 홍해를 지나 광야를 통과하게 하시면서 인도하신 이유는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은 “거룩함”입니다. 여기서 거룩함의 의미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자기들의 기준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건져내시고 구원하신 것은 더이상 그렇게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따라 살아가게 하시기 위한 것이지요. 음식법은 마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율법 아래 묶습니다. 세상에 물들어 살지 않고 세상과 구별된 삶이 거룩함의 비결임을 음식법을 통해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지요.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안식일, 일년에 몇 번 있는 절기 때만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매일 돌보고 먹어야 하는 일상에서 그런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성경은 이 음식법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신약성경을 보면 음식법은 할례와 함께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아주 중요한 율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사도들은 일관되게 이 음식법이 폐지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음식법은 할례와 함께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들을 구별하는 표지였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0장에서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온갖 짐승들을 보자기에 쌓아 내려뜨리시면서 먹으라고 세 번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하나님이 이 구별을 폐지하신 것을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을 폐지하신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첫 공의회가 열렸을 때에도 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해야 한다고 결정하면서 할례와 음식법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아야 함을 선언했습니다. 음식법이 하나님의 옛 백성들이 세상과 구별되어 살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사도들이 이 법을 폐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 음식법의 참된 의미를 성취하셨고, 충만하게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더럽게 되는 것은 부정한 음식을 먹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죄가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즉 음식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정말 가르쳐주시고자 하셨던 것은 그저 음식을 구별해서 먹으면 깨끗해지고 거룩해진다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 우리의 마음이 세상과 구별될 때 진정 깨끗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셨고,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살리셨습니다. 그 결과 이제 우리는 마음은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죄를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만 율법을 지켜 의롭다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시켜 주시고, 친히 간구하시고, 인도하여 주셔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진정한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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