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읽고 묵상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말씀을 잘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은혜 주시길 기도합시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본문을 읽고 난 후 아래 해설을 읽습니다.
공적 잘못과 사적 잘못 바로잡기
신명기 21장에는 다섯 가지 규례가 나옵니다. 먼저 1-9절은 들판에 살해당한 사람의 시체가 있는데 살인한 사람을 찾지 못한 경우, 가장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이 나서서 행해야 할 의식에 대하여 가르쳐 줍니다. 멍에를 메지 않은 암송아지를 잡아서 물이 항상 흐르고 갈지도 심지도 못하는 골짜기로 끌고 가서, 거기서 그 송아지의 목을 꺾어야 했는데요. 이러한 의식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여러 설명이 있는데 그중 설득력 있는 설명으로는, “이 의식은 비거주 지역에서 벌어진 살인을 상징적으로 재현하는 행위였는데, 먼저 죄책을 거주 지역에서 옮겨 내서 흐르는 물에 ‘흘려 보냄’으로써 살인이 야기한 모든 위협을 공동체로부터 제거한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장로들은 목을 꺾은 암송아지 위에서 손을 씻으며 무죄함을 고백하고 무죄한 피에 대한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그러면 항상 흐르는 물에 모든 죄가 씻겨 내려가듯이,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백성을 용서해 주십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 의식보다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죄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 공동체와 지도자들이 마땅히 보여야 할 반응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의 알지 못하는 사유로 인한 죽음조차도 공동체가 책임을 갖고 죄를 씻어야 한다고 말해줍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무죄한 자의 죽음에 대해(예컨대 낙태와 같은) 개인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공동체가 책임을 인정하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일까요?
10-14절은 전쟁에서 사로잡은 여성 포로를 아내로 삼는 것에 대한 규례입니다. 전쟁도, 포로도 경험해 보지 못한 우리에게는 이런 율법이 있는 것만으로도 야만적이고 가혹하다 생각할 수 있지만, 전쟁과 포로로 사로잡히는 일이 엄연한 현실이었던 사람들에게 본문은 가혹한 현실에서도 피해자와 약자를 최대한 보호해주기 위한 법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을 유심히 읽어보면 이 율법은 포로로 사로잡힌 여성을 위한 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로잡은 여성 포로를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첩이나 노예가 아니라 아내로 삼는 방법 뿐이었고, 혼인식을 하기 전에 먼저 한 동안 안정을 찾고 부모를 위해 애도할 수 있는 시간도 주었습니다. 만약 남자의 마음이 변하여 결혼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 여성을 자유인으로 놓아주어야 합니다. 본문은 승리자로서 힘 있는 남자의 욕망과 주장보다 매우 취약한 상황에 처한 여자의 신체적, 정서적 필요에 도덕적, 법적 우선순위를 부여합니다.
15-17절과 18-21절은 서로 균형을 이루는데요. 첫째 율법은 아들을 부당한 아버지로부터 보호하고, 둘째 율법은 부모를 제멋대로인 아들에게서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일부이처가 일반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율법은 그러한 부정적인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의 위험을 지적합니다. 본문은 일부이처가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편애를 지적하며 그것이 가정에 가져올 문제들을 드러내며 암묵적으로 비판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데요. 아버지의 편애에도 불구하고 장자의 적절한 권리가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변덕에 고통당해서는 안 되듯이 부모도 한 아들의 고칠 수 없는 행동에 고통당해서는 안 됩니다. 이 율법도 언뜻 보면 매우 가혹해 보입니다. 단순한 체벌도 인정하지 않는 우리 시대에 불순종한다고 자녀를 처형한다는 개념은 너무 야만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율법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먼저 이 율법은 말을 안 듣는 어린 자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반복된 부모의 훈육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심각한 비행 청년에 대한 것입니다. 더이상 부모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이 아들이 기업을 받아 가족을 책임지게 되면 가족도 공동체도 위태롭게 될 것이라 생각될 때, 부모는 그 아들을 장로들 앞으로 데려갑니다. 이는 자녀의 문제를 공동체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고 있는 것이지요.
자녀가 계속해서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것은 다섯째 계명을 노골적이고 지속적으로 위반하는 것으로, 이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항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공동체는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적 진노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처벌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에서 실제로 이 율법이 적용되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 율법은 그 자체로 최후의 수단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녀들은 이 율법의 존재 만으로도 다섯째 계명을 무겁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끝으로 22-23절은 범죄하여 처형된 시체를 나무 위에 매달 때, 밤새도록 두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시체를 매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보여 범죄를 억제하기 위한 것인데요. 그 이유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기에, 해가 저물기 전에 내려서 하나님이 주신 땅을 더럽히지 않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후에 밤이 되기 전에 시신을 내린 것도 이 규례에 따른 것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인데,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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