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읽고 묵상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말씀을 잘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은혜 주시길 기도합시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본문을 읽고 난 후 아래 해설을 읽습니다.
절반의 순종이 가져온 비극
사사기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1:1)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시나요?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에게 다른 신을 섬길지, 여호와 하나님만 섬길지를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하자, ‘아니다, 너희는 그렇게 못한다.’고 대답했지요.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질투하시는 분이시므로, 적당히 순종하고 타협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겠다고 맹세하고 언약을 세웁니다. 사사기 1장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 맹세와 언약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데요. 결론부터 말하면, 여호수아의 염려대로 이스라엘은 실패합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사사기 1장의 이스라엘의 모습을 ‘절반의 제자도’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고, 절반만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은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라고 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지목하셨고, 유다 지파가 순종하여 올라갑니다. 시므온 지파와 함께 올라갔는데요. 시므온 지파의 기업은 유다 지파의 기업 안에 있었기 때문에, 기업을 정복하기 위해 함께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대로 가나안 족속들을 유다 지파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아도니 베섹의 이야기(5-7절)은 이 정복 전쟁은 가나안 사람들의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사건임을 잘 보여줍니다. 유다는 예루살렘과 헤브론 등 중요한 지역을 먼저 점령한 후에, 드빌 사람들이 사는 기럇 세벨을 칩니다. 갈렙은 기럇 세벨을 정복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딸 악사를 아내로 주겠다고 말합니다. 갈렙의 아우요, 후계자인 옷니엘이 기럇 세벨을 정복하고 악사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옷니엘과 악사는 남방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그곳은 이스라엘의 남쪽 국경으로 황량한 곳이었습니다. 아마도 갈렙은 옷니엘을 신뢰하여 국경수비대장으로 보낸 것 같습니다. 안주인으로써 살림을 책임져야 했던 악사는 척박한 남방 지역에서 살아가기 위해 갈렙에게 복을 구하며, 샘물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갈렙은 흔쾌히 윗샘과 아랫샘을 모두 줍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이런 갈렙과 옷니엘, 악사는 ‘전심의 제자도’를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용감하게 싸우고, 하나님이 주신 기업에서 온전히 축복을 누리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이 계속되었으면 좋겠지만, 불행하게도 이어지는 이야기는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19절은 유다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산지 거민을 쫓아냈지만, 골짜기의 거민은 쫓아내지 못했다고 하면서, 그 이유가 철병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철병거는 핑계에 불과하고, 진짜 이유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과의 전쟁은 군대의 많고 적음, 무기의 강함과 약함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함에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드보라는 철병거를 가지고 있는 야빈의 군대와 싸워서 승리하기도 했습니다. 베냐민 지파도 예루살렘에 사는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고, 그 결과 여부스 사람이 베냐민 지파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요셉 지파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므낫세, 에브라임 족속은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지 못하였고, 가나안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스블론, 아셀, 납달리 지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가나안 사람들을 다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쫓아내지 못하였다’고 번역되어 마치 능력이 부족한 결과로 보이는데요. ‘쫓아내지 않았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문법에 더 가깝습니다. 문맥도 그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28절은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도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고 그들에게 노역을 시켰다고 말합니다. 즉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들과 싸우는 것은 위험하고 힘들고 어려운 반면, 그들을 노예로 삼아 노역을 시키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여,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을 절반의 순종, 절반의 제자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편의와 이익이 순종을 이겼습니다. 하나님께도 (적당히) 순종하였고, 나도 이익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만족할 만한 ‘윈윈 전략’이었을까요?
이런 절반의 순종의 결과는 무엇인가요? 표면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들이 가나안 사람들을 다 쫓아냊지 않았다고 반복하는 이야기 속에 그들이 이미 불신앙의 내리막길에 올라섰음을 미묘하게 보여줍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 스블론이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은 결과 “가나안 사람이 그들 중에 거하였습니다”(17,29,30절). 이어서 아셀과 납달리가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은 결과를 말할 때는 표현이 조금 바뀝니다. “아셀과 납달리는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다”(32,33절)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단 지파는 아모리 족속에게 밀려 자신들이 받은 기업이 아니라 아모리 족속이 결심하고 거주하기로 작정했던 지역 밖에 거주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을 때, 처음에는 우리의 신앙에 약간의 타협 정도로 생각됩니다. 그렇게까지 심각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내 주객이 전도됩니다. 쫓아내지 않은 가나한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나안 사람들 안에 있게 됩니다. 즉 불신앙이 주도하는 삶 속에 약간의 신앙을 가지고 살게 되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면 세상이 정한 경계에 의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업을 잃어버리고 쫓겨나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타협, 곧 절반의 순종이 가져오는 무서운 결과입니다. 우리는 왜 여호수아가 그토록 간절하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라”고 호소하였는지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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