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읽고 묵상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말씀을 잘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은혜 주시길 기도합시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본문을 읽고 난 후 아래 해설을 읽습니다.
예상치 못한 구원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의 일부는 정복하였지만 일부는 남겨두었습니다. 그 결과 가나안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살게 되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황은 역전되어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들 속에 살거나 오히려 가나안 사람들에 의해 휘둘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들처럼 되었습니다. 그들의 신을 섬기고 그들의 방식대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살면 더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결과가 찾아왔지요. 그들은 더이상 대적들을 당해낼 수 없었고, 주변 나라들의 압제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아야 했습니다. 남아 있는 가나안 족속은 그렇게 이스라엘의 시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가나안 족속과 맞서 싸운다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상을 섬기고 가나안 사람처럼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대적의 손에 넘기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시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전쟁’을 가르쳐 알게 해주시기 위한 시험이라고 말합니다(3:1-2). 이스라엘이 ‘다른 세대’가 된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행하신 일들을 알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전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어떻게 큰 일을 행하시는지 잘 보여주는데요.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시고 승리를 주시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할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여리고 성 전투가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싸우지 않고도 성을 무너뜨리고 정복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남아 있는 가나안 족속들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결과이고, 하나님의 징계의 수단이면서, 또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할 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는 증거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마침내’ 가나안 사람들과 혼인하며 그들의 신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사람들과의 혼인을 금지하시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곧 신앙의 혼합을 의미하고, 혼합된 신앙은 부패하고 변질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7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고 말합니다. 곧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렸다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기억에서 사라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나의 삶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에 더 가깝습니다. 즉 머리로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도 압니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 삶 가운데 그것이 ‘진짜’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이 진짜라고 믿는대로 사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이 땅의 현실이 더 진짜 같을 때, 더 현실적일 때 우리는 하나님을 밀어내고 세상을 가까이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우상을 섬기고 세상 사람들처럼 되어 살아가는 이유가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곧 지식으로 아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삶에 생생한 실제로 다가오도록 아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을 때 피상적으로 대하지 않고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그 말씀이 메마른 우리의 마음을 충분히 적시게 해야 합니다.
사사기 3장에는 세 명의 사사가 나옵니다. 사사란 구원자를 의미합니다(9, 15, 31절).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고 우상을 섬기며 악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적의 손에 붙이십니다. 악을 행할 때 괴로움과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은혜입니다. 악을 행하면서도 행복하고 평안한 것이야말로 저주입니다. 고통 속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가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고통 속에 부르짖는 소리를 모른척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자를 보내주시지요. 그들이 바로 사사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사사는 옷니엘입니다. 그는 사사의 모범적인 전형입니다. 그는 갈렙을 잇는 믿음의 사람으로,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고 백성들을 구원합니다. 옷니엘이 살아 있는 40년 동안 이스라엘은 평안했습니다. 문제는 옷니엘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가 죽으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 자손은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합니다(12절). 따라서 우리는 옷니엘보다 더 나은 구원자를 기대하게 됩니다. 그는 우리를 영원히 구원해 줄 수 있는 구원자여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두 번째 사사는 에훗입니다. 성경은 그를 ‘왼손잡이’라 말합니다. 왼손잡이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오른손잡이가 정상이라고 생각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그가 정상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옷니엘과 대조되는 점입니다. 옷니엘은 누가봐도 사사로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었다면, 에훗은 “저 사람이 우리의 구원자라고?” 생각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의 진짜 구원자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분은 실제로는 옷니엘과 같이 온전한 구원자이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구원자로서 적합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가난하고 약하고 무엇보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입니다. 누가 이런 분을 구원자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세 번째 사사 삼갈은 더욱 의외의 인물입니다. 삼갈에 대하여는 아주 간단히 기록되어 있어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가 블레셋 사람을 물리칠 때 사용한 ‘소 모는 막대기’는 삼갈의 정체를 더욱 궁금하게 합니다. 그런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옷니엘과 같은 온전한 사람 뿐만 아니라 에훗, 삼갈과 같이 예상치 못한 사람도 사용하십니다. 우리의 진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세상이 전혀 예상치 못한 분으로 오셔서,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하나님의 지혜는 이 세상보다 큽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왕, 장군으로 오셔서 힘과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목수로 오셔서 처참한 실패와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승리가 아닌 패배를 통해서, 높은 곳에서가 아닌 낮은 곳에서, 지혜로운 방식이 아닌 어리석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구원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지혜로는 우리의 참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바라볼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지혜로 볼 때 비로소 우리는 예상치 못한, 우리의 참된 구원자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