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4) 애통하는 사람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세상에서는 돈이 많은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돈으로 소유할 수 없습니다. 천국이 그렇습니다. 천국은 오히려 나에게는 어떤 자랑할 만한 것도, 내세울 만한 것도 없다고 고백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스스로 얻으려는 사람은 결코 얻을 수 없고, 겸손히 은혜를 구하는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다”라는 말은 너무 슬퍼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슬펐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또는 간절하게 바라는 소원이 좌절될 때 우리는 애통해 합니다. 그러면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사람은 무엇 때문에 애통해 하는 것일까요? 앞서 팔복이 한 사람의 인격과 성품에 관한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란 죄와 비참으로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고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있는 이 죄와 비참 때문에 애통해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6:20-26에서 예수님꼐서는 복과 화를 함께 말씀하셨는데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눅 6:21b)라고 말씀하시고, 조금 후에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 6:24b)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는 것이 선한 일이고, 웃는 것은 악한 일이라는 말씀인가요? 당연히 그렇지 않지요. 예수님께서는 슬픔이나 기쁨 자체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슬프게 하고 기쁘게 하는 것, 곧 그 사람이 인식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와 비참 때문에 애통해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아무리 부자가 되고,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다 해도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자신은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음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즉 그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구체적인 현실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웃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소유하고 누림으로 웃고 즐거워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자신의 죄로 인해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이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심판은 공상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왜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지, 웃는 사람에게 화가 있는지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철저한 현실주의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 곧 우리는 반드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이 중요한 현실을 외면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위로로 쉽게 만족해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와 비참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은 세상의 어떤 위로와 즐거움으로도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이 사람을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고, 만족하게 할 수 있을까요? 바로 나를 이 죄에서 구원해주실 구원자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참된 위로를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말씀을 묵상할 때, 누가복음 7장 11-17절 말씀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문을 함께 읽고, 자기 백성을 돌보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를 묵상해 보십시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