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을 잘 읽고 깨달을 수 있도록 성령님의 은혜를 구하며 기도하고, 말씀과 해설을 읽습니다.
하나님의 헤세드가 승리한다
보아스는 (아마도) 아침 일찍 성문으로 올라갔습니다. ‘마침’ 그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갑니다. 이번에도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섭리하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무명의 그 기업 무를 자를 앉히고, 성읍 장로 10명을 청한 후에 상황을 설명합니다. 보아스는 나오미가 엘리멜렉의 밭을 넘겨주려고 내놓았다고 말하면서 그 땅을 무를 것인지 묻습니다. 아무개는 자신이 엘리멜렉의 땅을 무르면 나오미가 그 땅을 자신에게 넘겨 줄 것이라고 이해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흔쾌히 “내가 무르리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보아스는 좀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기업 무를 자가 해야 할 일은 세 가지인데, 첫째, 엘리멜렉의 밭을 대신 사야 합니다. 둘째, 엘리멜렉의 후손의 아내인 룻과 결혼해야 합니다. 셋째, 룻을 통해 낳은 첫 번째 아들이 엘리멜렉의 이름으로 그 기업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아무개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 것 같으니 기업 무를 자의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말하고, 보아스에게 그 권리를 넘깁니다. 이 기업 무를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익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때에도 그것이 내게 이익이 되는지 손해가 되는지를 먼저 계산했습니다. 그는 율법은 알았지만 율법에 담긴 사랑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그를 알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아무개입니다.
보아스가 기업을 무르기로 하자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나와 보아스와 룻을 축복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흥미로운 것은 다말이 유다에게서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이 보아스에게도 룻을 통해 후손을 주실 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다말이 유다에게서 쌍둥이 아들 베레스와 세라를 낳은 이야기는 창세기 38장에 나옵니다. 다말은 가나안 여인이었고, 유다의 첫째 며느리였습니다. 다말은 우여곡절 끝에 창녀로 꾸며 유다와 관계를 갖고 후손을 낳게 되는데요. 유다 지파는 이렇게 수치스러운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의 수치스러운 역사까지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는데 사용하셨습니다. 베들레헴 백성들은 룻에게서 다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이방 여인이었고,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되어 베들레헴에 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유력한 구속자 보아스를 통해 룻을 구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말과 유다를 통해서도 복을 베푸셨다면, 룻과 보아스를 통해서는 더 큰 복을 베푸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아들은 나오미의 생명의 회복자이고, 노년의 봉양자가 될 것입니다. 나오미를 사랑하는, 일곱 아들보다 귀한 며느리 룻이 낳은 복된 아들입니다. 나오미는 그의 양육자가 되고 그 이름을 오벳이라 지었습니다. 오벳은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마지막에 덧붙여진 족보는 유다의 아들 베레스부터 다윗까지의 족보인데요.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길로 헤세드를 베푸시며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고 계심을 요약적으로 보여줍니다. 인간의 부끄러운 실패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헤세드가 승리하였습니다. 그 궁극적인 승리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될 것입니다. 룻과 보아스의 헤세드는 그리스도의 헤세드를 예표하는데요. 조금 길지만 B.B.워필드의 글을 인용하며 마치겠습니다.
“그분은 자아를 갈고닦지 않으셨다. 신적 자아이심에도 말이다. 그분은 자아를 애지중지하지 않으셨다. 자기 영혼의 구석에 파묻혀 … 병적으로 자신의 필요에 골몰하지 않으셨다. … 그분은 사람들을 향한 사랑에 이끌려 세상으로 들어가셨고,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느라 자신을 망각하셨으며, 긍휼의 제단 위에 단번에 자아를 제물로 바치셨다. 그리스도는 자기희생 때문에 세상 속으로 들어가셨다.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자기희생 때문에 사람들을 피하는게 아니라 그들 속으로 들어간다. 인간이 고난당하는 곳마다 우리도 가서 위로한다. 인간이 힘들어하는 곳마다 우리도 가서 돕는다. 인간이 실패하는 곳마다 우리도 가서 일으켜 세워 준다. 인간이 성공하는 곳마다 우리도 가서 기뻐한다. 자기희생이란 시대와 동료 인간에게 무관심하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희생이란 다른 사람들 속에 스며든다는 뜻이다. 그들 속에서 자아를 망각한다는 뜻이다. 각 사람의 희망과 두려움, 동경과 절망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우리의 심령과 활동과 긍휼이 다양한 형태로 복잡다단하게 반응한다는 뜻이다. 풍요로운 발전을 거듭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의 삶이 아니라 수많은 삶을 산다는 뜻이다. 넘치는 사랑과 긍휼의 실로 우리 자신을 수많은 영혼에 얽어매면, 그들의 삶이 곧 우리의 삶이 된다.”
룻기는 죽음으로 시작하여 생명으로 마칩니다. 상실에서 채움으로 나아갑니다. 그리스도 안에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우리의 헤세드를 통해 죽어가는 사람들, 텅 빈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생명으로 채워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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