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을 잘 읽고 깨달을 수 있도록 성령님의 은혜를 구하며 기도하고, 말씀과 해설을 읽습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함같이 사랑하다
다윗이 라마에서 도망하여 요나단에게 옵니다.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라마에 왔을 때, 사울은 사무엘 앞에서 벌거벗고 예언하였다고 했습니다(19:22-24). 사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자신을 잡으러 오자 다윗은 도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외인 것은 그가 사울로부터 먼 곳으로 도망하지 않고 가까운 곳, 곧 그의 아들 요나단이 있는 곳으로 도망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울을 피해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사무엘에게 피했던 다윗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사울을 피해 믿음의 벗 요나단에게 피하였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에게 다윗을 해치지 말아달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다윗을 생명처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이 사울과 자신을 중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늘 우리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입니다. 다윗은 요나단이 인식하고 있는 현실과 자신의 생각이 다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죽음의 거리는 고작 한 걸음에 불과하다는 것이 다윗의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사울이 정말 다윗을 죽이려는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울이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자신이 모를리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요나단을 통해 사울의 진심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마침 내일은 왕과 신하들이 함께 식사를 해야하는 월삭인데, 다윗이 그 식사에 불참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이 이유를 물을 때 요나단이 다윗을 고향으로 보내주었다고 말하게 하였습니다. 그때 사울의 반응을 통해 사울의 진심을 확인하기로 했지요. 사울이 다윗을 정말 죽이려고 한다면, 월삭 식사의 자리는 다윗을 잡을 절호의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단이 다윗을 그 위험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말을 들으면 사울이 분노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과연 사울은 요나단에게 분노를 쏟아냈습니다. 다윗이 살아서 왕의 자리를 차지하면 요나단 네가 가장 손해를 보는데, 왜 정신을 못 차리고 그런 짓을 했냐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다윗은 죽어야 할 사람이니 당장 데려오라고 말합니다. 분노를 쏟아내는 아버지 앞에서 요나단은 할 말을 합니다. ‘도대체 다윗이 무슨 죄가 있어 죽이려 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분을 못이겨 요나단에게 창을 던지려 합니다. ‘다윗이 왕이 되면 어차피 끝인데, 차라리 내 손에 죽어라’ 이런 마음이지 않았을까요.
사울의 분노는 왕위가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4-16절을 보면 요나단은 다윗과 언약을 맺으며 자신이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인자를 베풀고, 하나님께서 다윗의 대적을 다 끊어버리실 때에도 요나단의 후손에게 그 인자를 끊어버리지 말아달라고 말합니다.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셔서 다윗의 대적을 물리치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것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셨다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요나단에게 해야 할 것 같은 부탁을 요나단이 다윗에게 한 것입니다. 사울의 진심을 알고 다윗을 도망시키는 요나단은 다시 한 번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42절).
요나단은 다윗 못지 않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왕이 되지 못해도,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의 뜻을 존중했고,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기쁘게 순종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을 자기 생명과 같이 사랑하였고, 다윗이 위험 중에도 찾을만큼 신뢰할 수 있는 친구였습니다. 요나단과 같은 친구 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요나단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고, 더 신뢰할 수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버려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자기 생명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신 예수님께로 피하십시오.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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