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을 잘 읽고 깨달을 수 있도록 성령님의 은혜를 구하며 기도하고, 말씀과 해설을 읽습니다.
변하지 않는 현실에 낙심하여 세상으로 피하다
다윗은 “이러다가는 결국 사울의 손에 망하겠구나, 블레셋 땅으로 도망하는 것이 최선이겠다.”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현실에 절망하고 낙심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땅에서 다윗의 삶은 항상 긴장하며 떠돌아다녀야 하는 삶이었습니다. 다윗 혼자라면 사명감으로 어떻게든 버텨보겠지만, 가족들과 함께 하는 사람들도 다윗과 동일한 삶의 무게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다윗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여 사울을 살려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갔습니다(삼상 26:25). 무슨 말인가요? 현실은 바뀌지 않고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낙심하게 합니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 450명과 대결하여 승리했지만, 여전히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 현실 앞에서 낙심한 것처럼,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우리도 어려운 형편 속에서 신앙을 지키려 힘쓰다가 결국 낙심하고 무너져 내릴 때가 언제입니까? 도무지 변하지 않는 상황, 변하지 않는 사람으로 인해 낙심합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불신앙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다윗의 블레셋 망명은 이전과 달리 순조롭게 진행됩니다. 사울과 다윗의 관계가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둘 사이의 원한 관계를 이용한다면 다윗이 블레셋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다윗이 블레셋으로 넘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사울도 더이상 다윗을 쫓지 않습니다. 다윗의 블레셋 도피는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더이상 쫓기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되고, 안정되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분명 상황은 좋아진 것처럼 보이는데요. 다윗은 이 삶이 행복하고 만족스러웠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떠나 이방 땅으로 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았습니다(삼상 26:19). 풍족하고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며 살아갈 수 없는 삶이었지요. 세상적으로 풍족하고 평안하지만 신앙을 지키기 힘든 삶과 세상적으로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삶. 여러분은 어떤 삶을 선택하겠습니까? 답은 쉽지만 선택은 쉽지 않지요? 그런 삶을 살아내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한 순간도 그렇게 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선택은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 이해가 됩니다. 다윗은 아기스에게 지방 성읍을 달라고 요청하고 시글락을 받습니다. 시글락은 본래 유다지파에 분배된 땅인데(수 15:31) 정복하지 못하여 블레셋의 영토로 있는 땅입니다. 하지만 다윗 이후로 유다의 영토가 되지요. 다윗이 불신앙으로 방황하는 때에도 하나님의 언약과 계획은 신실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시글락에서 다윗은 남방에 있는 그술, 기르스, 아말렉 족속을 쳐서 약탈하며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죽였는데요. 가드 왕 아기스에게는 유다와 그 근처에 있는 족속들을 약탈했다고 말했기 때문에, 자신의 거짓말이 탄로 나지 않게 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여야 했습니다. 다윗이 유다를 공격하지 않은 것은 최소한의 신앙을 지키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는 거짓말을 하고 필요이상으로 잔인해져야 했지요. 세상과 신앙을 적당히 타협하며 살려 할 때 이런 부작용은 필연적입니다. 블레셋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이것이 최선이라고 말하고 싶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땅에서 최선의 삶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죄를 깨달았을 때 최선은 그 죄를 유지하며 다른 신앙 행위를 더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지요. 그리고 세상적인 삶에 빠져서 돌이키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그들이 신뢰하는 그 세상적인 삶을 흔드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 그것은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이었습니다(삼상 2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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