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1] 마태복음 14장에 “세례 요한의 죽음”이 나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고향 배척 이야기 다음, 열두 제자의 파송 이야기가 나오고, 그다음 세례 요한의 죽음 이야기가 나옵니다. 반면 <마태복음>에서는 이미 열두 제자의 파송 이야기가 나왔고,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고향 배척 이야기 다음에 이 이야기가 바로 나옵니다. 시간적으로 세례 요한의 죽음이 이미 훨씬 이전에 이루어졌던 사건이라고 보았을 때(1-2절), (마가와 비교해서) 마태가 본문 순서를 위와 같이 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답변1] 마가복음의 문맥에서 세례 요한의 죽음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송하신 이야기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제자들이 행한 기적들로 인해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나 헤롯 왕에게 알려집니다(막 6:13-14). 헤롯의 반응은 죽은 세례 요한이 살아났다는 것인데요. 이 말로 세례 요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 후에(막 6:14-29), 다시 사도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의 행한 일을 보고하는 장면으로 돌아갑니다(막 6:30). 이렇게 마가복음에서 세례 요한의 죽음 이야기는, 비록 제자들이 예수님의 파송을 받아 복음을 전하고 큰 기적을 행하였지만 그들이 맞이할 운명은 세례 요한과 같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는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의 문맥은 조금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배척당하시고, 많은 능력을 행치 않으셨다고 말한 후에(마 13:57-58), ‘그때에’ 헤롯이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다고 말합니다(마 14:1). 헤롯의 반응을 도입부로 삼아 세례 요한의 죽음 이야기를 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다만 마가복음에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을 장사 지냈다고만 말하는데, 마태복음은 요한의 제자들이 장사 지낸 후에 예수님께 와서 고하였다고(마 14:12) 말하고, 예수님께서 그것을 들으시고 따로 빈 들에 가시기 위해 배를 타고 떠나셨다가 거기서 큰 무리를 만나 병을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행하셨다고 말합니다. 즉 마태복음에서 세례 요한의 죽음 이야기는 예수님과 더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고향에서 배척당하신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죽음 이야기를 들으시고, 따로 한적한 곳을 향해 가시다가 불쌍한 무리들을 만나 그들을 고치시고 먹이십니다. 배척당하신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허망한 죽음 이야기를 들으셨을 때, 예수님도 그렇게 죽임 당하실 것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떠나고자 하셨지만, 거기까지 좇아온 많은 무리들을 예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살리는 사역을 행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배척당하시고 결국 죽임을 당하실 것이지만, 목자 없는 양 같이 불쌍한 무리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살리시고 구원하시는 일을 끝까지 감당하실 것입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의 문맥에서 세례 요한의 죽음 이야기의 역할 또는 강조점의 차이를 생각하면, 두 복음서의 본문 순서의 차이를 이해하는데 조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질문2] 마태복음 14:5에서 헤롯이 민중을 두려워했는데, 헤로디아가 머리를 달라고 했을 때 왕이 근심하면서 내어준 이유가 민중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인가요?
[답변2] 네, 본문의 문맥에서 헤롯의 근심은 민중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병행 본문인 마가복음 6:20에는 헤롯이 근심하는 또 다른 이유가 나오는데요. 헤롯이 요한을 옥에 가두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헤롯은 요한의 말을 들을 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었다고 합니다. 헤롯이 보기에 요한은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비위만 맞추려는 사람들과는 달랐지요. 그래서 헤롯은 요한을 보호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한 약속으로 인해 ‘근심하며’ 그의 머리를 내주었습니다.
[질문3] 마태복음 14:13-21.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열두 바구니가 남았는데, 어떤 방식으로 나누었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덧붙여서) 예전에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오병이어에 대해 다루었는데, 어느 신학자가 설명하길 한 소년이 가져온 오병이어를 예수님께서 축사하여 나눌 때 감동받은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내놓아 남을 만큼 풍성해졌다고 설명하였는데요. 이렇게 이해해도 괜찮은가요?
[답변3] 1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축사하신 후에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한 주석가는 이 떡은 중동 사람들의 주식인 ‘피타’일 거라고 하면서, 떡 하나가 1인분 식사량에 해당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큰 떡은 아닌 것 같은데요. 예수님께서 떡을 잡고 계속 떡을 떼시면 제자들이 그 떡을 받아 바구니에 채워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을까 생각되는데요. 정확히 어떤 모습이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언급된 견해는, 떡이 늘어나는 것보다 사람의 마음이 바뀌고 사랑이 늘어나는 것이 더 위대한 기적이라는 교훈적인 의도가 마태가 오병이어 사건을 기록할 때 염두에 두었다고 해석하고 설명한 것 같습니다. 통찰력 있는 견해로 보입니다. 그러나 과연 본문이 그것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려운데요. 혹시 성경에 기록된 초자연적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제하여 자연적인 방식으로만 본문을 이해하려다 보니 이렇게 설명하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질문4] 오병이어 기적에 관한 질문입니다. 기독교 서적 혹은 신학자들 중에서 정확히 어떤 물고기다, 어떤 빵이다 라고 언급한 것이 있을까요? 오늘날로 가능한 음식을 뽑자면, 대왕 고래(180ton) 두 마리와 세계에서 가장 긴 피자 5개(미국에서 피자 1개당 1.93km의 기네스북을 기록)로 오천 명을 먹이실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극단적인 예로 영광 굴비 2마리와 건빵 5조각으로는 오천 명이 먹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시절에 가장 큰 음식에 대한 근거자료나 추측할 수 있는 음식 종류를 알고 싶습니다.
[답변4]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이 먹으려면 물고기 2마리와 떡 5개라 해도 어느 정도 커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6:9에서 제자들이 오병이어를 소년에게서 받을 때, 많은 사람들에 비해 너무 적은 것이라 말했습니다. 빵과 소금으로 절인 물고기는 갈릴리 바다 주변 주민들의 음식이었고, 도시락이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한 학자는 여기서 빵은 당시 중동 사람들이 먹는 피타(보리떡)로 대체로 한 개가 1인분이었다고 합니다. 물고기는 아마도 소금에 절인 정어리였을 것이라고 추측하는데요. 당시 갈릴리 바다에서 잡히는 물고기 중 가장 작은 물고기에 속합니다. 이 말이 맞는다면 이 소년이 가져온 도시락은 한 사람에게는 남을 만큼 충분한 양이었습니다. 문뜩 소년에게 도시락을 싸주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혹시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이웃들과 함께 나누어 먹으라는 따뜻한 마음이 담긴 도시락이었을 것입니다. 식사를 해야 할 인원이 오천 명이 넘는 것을 보면서 소년은 자신의 도시락으로 모두가 함께 나누어 먹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가져가면 예수님께서는 이 적은 음식으로 이 많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이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상상일 뿐입니다만, 요지는 오병이어 사건은 아주 적은 음식으로 아주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사건입니다.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 이 음식의 크기와 양이 어느 정도였는지 파악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이 일을 행하신 까닭이 더욱 중요하겠지요. 굶주린 백성들을 향한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과 그들을 배불리 먹이시고자 하시는 따뜻한 마음을 봅니다. 무엇보다 이 땅의 양식으로 만족하며 영원한 생명의 양식에 굶주려 있는 백성들을 향한 주님의 긍휼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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