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1] 마태복음 9:4에서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의 생각을 아시고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려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보통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바로 인정하지 못하고, 말씀 뒤에 일어난 상황을 통해 하나님의 권위를 판단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악한 생각이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6절에서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의 중요함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까요?
[답변1] 네, 그렇게 이해하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질문2] 마태복음 9: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라고 하셨는데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답변2] 예수님의 질문은 청중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수사학적 질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뭐가 쉽다는 것일까요? 학자들의 견해도 둘로 나뉩니다. (1)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이 더 쉽다. 왜냐하면 죄 사함의 결과는 눈에 보이지 않고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은 결과가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2)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이 더 쉽다. 왜냐하면 죄 사함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이고, 따라서 이 말을 하면 신성모독 죄라는 반응이 따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이 더 어렵고,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더 쉽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6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신 것은 더 어려운 일이었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죄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질문3] 마태복음 9:13에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답변3] 호세아서에서 이 말씀은 종교적인 규례들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규례들에 집착하여 정작 하나님이 원하시는 긍휼을 잃어버린 자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본 바리새인이 비난하는 말을 할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곧 식사에 대한 규례에만 집착하여 정작 하나님이 원하시는 긍휼(사랑)은 잃어버린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이고 제의적인 신앙을 비판하시는 것입니다.
[질문4]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율법에 대한 순종의 필요성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요) 예를 들어, 마태복음 9:14-17의 금식 논쟁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위선을 비판하실 때, 율법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판을 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비판은 실제로는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외식하는 것에 대한 비판인지, 아니면 율법에 더하여 만들어낸 규칙과 전통에 대한 비판인지, 둘 다인지 궁금합니다.
[답변4]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외식을 비판하신 것에는 둘 다 포함되는 것 같습니다. 다만 마태복음 9:14-17의 금식 논쟁의 경우는 위의 예와 조금 다른 경우인데요. 요한의 제자들이 나와서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예수님이 함께 있는 지금은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지요. 이어지는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지 않는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않는다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이 금식하는 이유는 옛 언약 시대의 관점에 따랐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직 메시아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금식하고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가 오셨고, 지금 여기에 함께 있습니다. 즉, 새 언약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금식하며 기다릴 때가 아니라 성취를 기뻐할 때입니다. 옛 시대의 관습대로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새 시대의 관점에서 율법을 지키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질문5] 마태복음 9:30에 보면 예수님께서 두 맹인에게 “너희 믿음대로 돼라"라고 하시며 고쳐주셨고,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온 땅에 전파하였습니다. 두 맹인에게 믿음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고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요?
[답변5] 마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치유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 이것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종종 나옵니다(8:4; 12:16; 16:20; 17:9). 이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은 예수님께서 아직 자신이 본격적으로 드러나야 할 시기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직 사람들이 메시아에 대한 바른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단순히 기적에 대한 열광으로 예수님께 몰려오는 것을 경계하셨다는 것이지요. 마태복음 12:16-21에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는 이유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주는데요, 이사야 42:1-4을 인용하며,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말씀은, 하나님의 택하신 메시아가 이방에 공의를 알게 하실 것인데, 아주 겸손히 낮아져서 그 일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12:19(새번역)은 이렇습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외치지도 않을 것이다.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 하나님 나라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실 것이지만 겸손히, 조용히 그 일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두 맹인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예수님께서 능히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하실 수 있다는 것도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겸손히, 조용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시며 이 사역을 감당하고 계신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알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나가서 온 땅에 소문을 퍼뜨렸지요. 그러니 무지에 의한 불순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두 맹인이 예수님이 엄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식을 온 땅에 전파한 것은, 이 일은 도저히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일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생을 어둠 속에서 살았던 맹인이 빛을 보고, 사물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얼마나 큰 기쁨과 감격이 있었을까요. 여전히 어둠 속에서 빛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마음이 느껴지는듯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가져서 예수님의 의도에 맞게 순종하는 것도 중요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한 기쁨, 놀라움, 감격을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질문6] 마태복음 9:30에서 예수님께서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라고 하셨는데, 다른 치유 기적을 행하실 때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고, 또 치유 기적을 행하실 때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 알고 있었는데, 왜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답변6] 예수님께서 다른 치유 기적을 행하실 때에는 이 말씀을 하지 않으셨는데, 이 경우에는 말씀하셨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두 맹인의 경우는 집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 기적을 알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린 이유를 포함하여 예수님은 이 일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주변 사람들이 물어보면 대답을 해야 했을 것이고, 그들이 경험한 크고 기이한 일을 도저히 말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떻게 이 사역을 감당하실지에 대해서(이것도 앞의 설명을 참고해 주세요) 말씀해 주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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