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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Lee Juman

복음에 합당한 삶(2)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방법

우리를 복음에 합당하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방법, 예레미야 1:10


해체와 재건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 우리는 모국어에 적용되는 규칙 중에 새로운 언어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 후에 새로운 언어에 적용되는 규칙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의 언어를 배우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되기 위해서도 비슷한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은 ‘해체와 재건’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동일한 내용을 바울은 ‘죽음과 부활’이라는 용어로 표현했습니다(빌 3:10-11).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죄에 대한 그의 죽으심과 새 생명에 대한 그의 부활하심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죄를 죽이고 그리스도를 옷 입는 방식으로 우리 삶 전체에 작동합니다(골 3:1-4,5,12). 이렇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본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해체와 재건을 수반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 서문에서 예레미야 1:10의 말씀을 인용하여 복음이 작동하는 방식을 설명하였는데요, 복음의 핵심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즉, 우리에게서 왔고 우리에게 속했기 때문에 우리를 기쁘게 해 주는 모든 것)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라는 것’(렘 1:10)이다. 그리고 우리 밖에 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건설하고 심으라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해체와 재건, 이것이 거룩한 변화의 패턴입니다. 우리의 삶과 생각과 동기와 욕망과 행위의 패턴이 죄로 복잡하게 얽혀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엉킨 것을 푸시고 우리에게서 독소를 제거하시고 우리를 복음에 합당하게 만드시는 일은 때로는 고통스럽고 기나긴 과정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본질적인 목표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우리를 자신의 성육신하신 아들처럼 만드시려는 것입니다. 아들을 닮도록 우리를 변화시키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단순한 ‘뜻’은 우리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신 것”(롬 8:28-29)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되는 것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해체와 재건’이라는 방법으로 한 사람을 복음에 합당하게 변화시키는 과정은 요셉의 삶에서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열 일곱 살의 요셉은(창 37:2) 지혜와 배려와 인내가 다 부족한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하나님 중심적이라기보다 자기중심적입니다. 이후의 요셉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이었습니다. 그는 형들에게 팔려 노예가 되었고, 강간 미수 혐의로 감옥에 갇혔으며, 해몽을 통해 억울함을 풀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잊혀진 채 기약없는 감옥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십사 년의 시간이 흐르고, 서른 살의 요셉은(창 41:46)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 위해 바로 앞에 서게 됩니다. 이후로 나타나는 요셉의 모습은 우리가 처음 본 열 일곱 살의 요셉과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입니다. 요셉이 해체와 재건의 세월을 통과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를 하나님이 계획하신 때와 하나님이 의도하신 장소에 맞는 사람으로 빚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위대한 일을 위해 요셉을 준비시키고 계셨습니다. 많은 생명을 “보존”하고 “구원”하기 위해서뿐 아니라(창 45:5,7; 50:20), 가족 안에 화해를 낳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요셉은 지혜와 인내와 배려와 하나님 중심성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해체”하시고, 또 “재건”하실까요? 기본적으로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는 그분의 섭리의 손을 통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손


우리에게 첫 번째 중요한 원리를 제공하는 말씀은 로마서 5:3-4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앞에서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이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말합니다. 환난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만큼 우리에게 즐거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환난 자체는 전혀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환난이 만들어내는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우리는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환난은 인내를 낳습니다. ‘인내’는 ‘휘포모네’(ὑπομονή)라는 헬라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기본 개념은 ‘무엇 아래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역도 선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엄청난 무게의 바벨을 들고 견디고 있습니다. 역도 선수의 힘은 이 압력을 통해 생겨나고 향상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힘, 인내, 끈기, 지속력과 같은 ‘시험을 통해 증명되는 성품’은 압력을 통해서만 계발됩니다. ‘연단’이라고 번역된 단어 ‘도키메’(δοκιμή)는 ‘시험을 통해 인정된 자질, 성품’을 의미합니다. 연단된 인품은 맨 땅에서 솟아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시련을 통해 우리 인생을 다듬은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입의 말씀


하나님께서는 섭리의 손을 사용하셔서 우리 삶에 영광의 빛줄기를 비추기도 하시지만, 또 한편으로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셔서 우리를 변화시키기도 하십니다(마 4:4; 신 8:3). 하나님은 특별히 성령님의 은혜와 능력 안에서 우리에게 주해되고 적용되는 말씀 선포를 통해 이 일을 하십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을(살전 2:13) 감사하면서 설교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러고는 이 말씀이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설교, 곧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말해 주고, 그 말씀에 반응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말해줄뿐만 아니라, 말씀이 그 자체로 우리 안에서 일합니다. 선포된 말씀은 우리에게 역사하고 우리 안에서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해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설교를 듣는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의 생생한 영향력 아래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설교의 영향력을 통해 우리 안에 생산해 내시려는 것은 우리 힘으로는 절대 생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은혜와 능력 안에서 풀이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자기 양을 부르시는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깨달아 회개하게 하시고, 죄의 용서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힘을 주시는 것은 바로 설교를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돕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닮은 꼴을 창조할 것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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