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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안에서 자아 찾기 (2) 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작성자 사진: Lee JumanLee Juman

내 인생의 목적은 누구인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성경은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는 이유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이 말의 의미가 조금 와닿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사람들에게 밥을 먹는 목적이 뭐냐고 물으면, 살기 위해서, 힘을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힘을 내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그래야 공부도 하고 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렇게 공부를 하고 일을 하는 목적이 뭐냐고 또 묻는다면,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다. 꿈을 이루어야 하는 목적이 뭐냐고 묻는다면요? 그래야 내가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의 경우 그의 삶의 최고의 목적은 “나의 행복”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나의 영광”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모든 사람의 궁극적인 목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본래 사람은 그런 목적을 위해 살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 줍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른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사 43:7)라고 말씀하고, 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우리 안에 두 가지 반발감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내 삶의 이유와 목적을 내가 선택하고 결정할 자유가 내게 없는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이 조금은 이기적으로 생각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한채 생각하고 싶고, 하나님을 생각하더라도 우리와 같은 선상에 두고 생각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쳐 주는 것처럼, 지극히 선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사실과, 우리는 제한된 지식과 능력을 가진 유한한 존재로 지음받았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이 말씀을 꼭 억압적이고 이기적인 것으로 생각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목적과 방향을 우리의 선택에 맡기시고 그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라고 하시는 것이 더 큰 억압과 폭력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우리의 삶에 대해서, 심지어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훨씬 많고 따라서 언제나 우리의 선택이 옳다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목적을 가르쳐 주시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가르쳐 주시고, 혹 그렇게 살지 못하고 실패할 때에도 우리를 용서하시고 도우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안식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신 것도, 하나님께서 자아도취적이고 이기적인 분이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시편 66:1-2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여기서 “즐거운 소리를 내라”와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송하라”는 두 개의 다른 명령이 아니라, 하나의 명령에 더 풍성한 의미를 담기 위한 문학적 표현으로, 히브리시의 전형적인 평행법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과 영화롭게 하는 것이 같은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후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답합니다. 두 개의 답을 제시하는 듯 보이지만, 질문과 대답의 동사 모두 단수(is)로 되어 있어서, 하나의 답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다르지 않고,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달리 표현하면 우리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누리고 즐거워할 수 있도록,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주십니다. 성경에서 언약을 표현하는 유명한 공식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우리의 소유로 주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신 것입니다. 그건 곧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실테니, 우리의 평생에 그 하나님을 알고 누리고 즐거워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와 신도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신도 자신을 주겠다고 말하지 않고, 인격적인 관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결국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 곧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무엇보다 우리를 위하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취가 아닌 즐거움을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주셨다는 이 사실이 우리를 진정으로 안식하게 합니다. 비록 성취의 측면에서는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지만, 그 모든 상황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는 즐거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을 이룰 수 있고, 하나님 안에서 결코 실패하지 않고 헛되지 않은 삶, 의미 있고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을까요? 즉 하나님을 가장 즐거워할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리의 최고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컨대 학생은 내가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단순히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한 것이 목적이라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할 때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처럼 느껴지겠지요. 하지만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라면, 힘들고 슬프겠지만, 이제 내 인생은 끝이야 라고 절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취하지 못할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고, 그렇다면 하위 목적은 이루지 못했어도 최고의 목적은 이루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최고의 목적과 하위 목적을 구분하여 최고의 목적을 지향하는 삶이 우리의 삶을 안정적이게 합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이 최고의 목적을 생각하고 지향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예배하는 영적 훈련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성경을 망원경에 비유합니다. 망원경은 너무 멀리 있어서 작고 희미하게 보이는 것을 크고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 자꾸 하나님이 작게 보이고 희미하게 생각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성경이라는 망원경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지혜롭고 아름다운 분이신지를 알아가야 합니다. 성경이 망원경이라면 주로 유튜브 SNS 등의 세속문화는 일종의 현미경과 같습니다. 현미경은 실제로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을 아주 크게 확대해서 보여줍니다. 세속문화도 그런 일을 합니다. 실제로는 우리를 그렇게 행복하게 해줄 수 없고, 만족을 줄 수도 없는 것들을 아주 크게 보여주고 중요하게 생각하게 해서 그거 없이는 불행하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멀리하고 세속 문화를 가까이할 수록 하나님은 작게 느껴지고 하나님의 아름다움도 덜 느껴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힘들어진다는 의미이지요.


나의 행복, 나의 영광을 최고의 목적으로 생각하며 살았던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갈 수 있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사역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예수님께서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참으시고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앞에 있는 이 기쁨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장차 영광스럽고 거룩하게 될 신부인 교회를 바라보심으로 인한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장 추하고 더러운 죄인일 때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가장 영광스럽고 거룩한 신부로 삼으시기 위해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참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고 기뻐할 만한 가치가 없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셨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는 가장 아름다우신 분이십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고, 억지로 감당해야 하는 의무도 아닙니다. 모든 성경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알 때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그리스도를 즐거워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 삶의 제일 되는 목적을 이미 이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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