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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Lee Juman

세상 속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1)

최종 수정일: 2021년 2월 7일


세상 속에서 뜻을 정하고 살아가기

다니엘 1:1-21


지난 주간에 코로나 관련된 뉴스를 살펴보다가, 서울의 한 주점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했고, 서울시에서 손해에 대한 배상을 청구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았습니다. 기사를 읽고 댓글을 보는데,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왜 교회에는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않느냐, 청구해라’라는 글들이었습니다. 교회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느낄 수 있었지요. 코로나 이전에도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비난이 있어 왔지만, 코로나 상황을 지나면서 교회에 대한 적대감이 사회에 급속도로 번져가고 있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집니다. 물론 이런 흐름이 코로나로 인해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코로나로 그 속도가 빨라졌을 뿐이지, 이전부터 우리 사회는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기독교 사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법이나 제도가 만들어질 때 우리가 성경과 신앙 양심에 따라 제안을 해도 세상은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난하고 조롱합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대부분의 학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계관에서 출발하고 있고, 우리 사회의 법과 제도와 문화는 하나님의 영원한 도덕법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사회에서 이런 현상은 더 심화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교회에 적대적인 세상 속에서 우리는, 그리고 교회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비기독교 사회와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떻게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면서도 세상이 우리를 소유하여 세상의 타락한 가치와 전제라는 틀 안으로 우리를 억지로 밀어넣지 않게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이번 겨울수련회에서 우리가 다니엘서를 통해 답을 얻고자 하는 질문입니다.


역사적 배경


다니엘 1장 1-2절은 다니엘서의 역사적 배경과 그에 대한 신학적 설명을 간략히 소개합니다. 여호야김 왕 때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침략합니다.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김을 포로로 사로잡고, 성전의 기물을 약탈해 갑니다. 이 일은 유다 백성들에게 매우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당시 문화에서 이 사건은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에게 패배하고 약탈당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2절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보다 약하거나 능력이 부족해서 바벨론에게 패배하고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바벨론 왕에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자기 백성들을 망하게 하시고, 왕과 성전의 물건들을 바벨론에게 넘기셨을까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할 경우 그들을 열방 중에 흩어 버리고 원수들의 땅에서 쇠퇴하게 만들겠다고 오래 전부터 말씀하셨습니다(레 26:33,39 참고).


더 가까운 이유는 이사야 선지자의 책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의 괴롭힘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벨론을 의지합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사신이 히스기야를 찾아왔을 때 왕궁의 보물과 무기들을 모두 보여주었습니다. 이 일로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보내셔서 히스기야를 책망하셨습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또 네게서 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사 39:6-7). 다니엘 1장 1-2절은 이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이 다스리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세상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언하며 다니엘서가 시작됩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동일합니다.


선택의 기로


느부갓네살은 유다에서 잡아온 왕족과 귀족 소년들을 선별하여 바벨론을 위해 충성할 신하를 세우려 합니다. 선별 기준은 외모와 신체 조건이 좋아야 했고, 무엇보다 바벨론의 어려운 언어와 학문을 배우기 위해 지적으로 준비되어야 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그 모든 면에서 잘 준비된 소년들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준비한 것이었지만, 역사의 잔인한 뒤틀림 때문에 예루살렘을 파괴한 느부갓네살과 바벨론을 위해 사용하게 됩니다.


왕은 이렇게 선별된 소년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방언을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왕립 학교에서 당대 최고의 지식을 배우게 됩니다. 또한 그들에게 왕의 식탁에 올라오는 진미와 포도주를 하사하였습니다. 이렇게 3년 동안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최고의 학문을 공부하고 나면 성적에 따라 바벨론의 고위직에도 진출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비록 지금은 비참한 포로 신세이지만, 이제부터는 출세와 성공이 보장된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이 일을 맡은 환관장 아스부나스는 다니엘과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를 불러 그들의 이름을 바벨론의 이름으로 바꿔줍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담긴 이름이 바벨론의 신들에 관한 이름으로 바뀌게 되지요.


이 모든 과정을 “바벨론 동화 프로그램”(Babylonian Assimilation Program)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파격적인 특혜를 주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신앙, 사상, 세계관을 바꾸려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사람이 되어 바벨론과 느부갓네살에게만 충성하라는 것이지요.

다니엘과 세 친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과 양심을 버리는 일이라고 거부하면서 순교하는 길이 있었고, 바벨론 왕이 제시하는 프로그램을 받아들이는 길이 있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순교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순교할 용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3, 6장에서 보게 되지만, 그들은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왕이 제시하는 프로그램을 모두 받아들이는 길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많은 것들을 수용하되, 한 가지를 거부하였습니다. 제 3의 길을 선택했다고 볼 수도 있겠는데요. 그 내용을 조금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바벨론의 학문을 배우다


바벨론의 교육은 많은 점에서 이스라엘의 신앙과 다른 종교-문화적 세계관에 기초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배워야 할 학문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가장 발전된 학문이었지만, 그 학문에는 점성술, 미신, 마술과 같은 바벨론의 신과 종교에 관한 것으로 가득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에 정통한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바벨론의 학문은 불쾌했을 뿐만 아니라 모욕적이고, 최악의 경우 우상숭배적이라고 느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니엘과 세 친구는 이것을 받아들입니다. 받아들인 정도가 아니라 그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시험 결과가 증명하지요. 나중에 왕 앞에서 구두 시험을 볼 때,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의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20절). 우리를 놀라게 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셔서 모든 학문과 재주를 잘 익힐 수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되거나 모순되는 그 학문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들은 바벨론이 믿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배우는 것을 그들이 다 믿을 필요는 없었지요. 여기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문화에 동화되지 않으면서 세상의 문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믿음의 기초 위에서 세상의 학문을 잘 분별하며 비판적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은 것을 믿고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이해하고 섬기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세상에 굴복하거나 순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복음을 알리고 전하기 위해서 세상에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최선을 다해서 학교에서 배우는 일반학문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바벨론의 이름을 사용하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이 바꿔준 이름도 그대로 사용합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사회적, 종교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름을 바꾸는 것은 이 소년들에게 매우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스라엘의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이방 신의 이름으로 맞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다니엘과 세 친구는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아마도 바울이 우상의 제물에 대해 가졌던 신앙의 성숙함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상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고, 따라서 그 우상과 관련된 이름 또한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그들에게 강요된 “바벨론 동화 프로그램”(Babylonian Assimilation Program)을 수용합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포로로 끌려간 이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부했던 내용(렘 29장)과 같았습니다. 예레미야는 포로로 끌려간 이들이 바벨론에서 정착해야 하고, 거기서 살고 일하고 공동체를 세우고 번성해야 하며, 바벨론을 위해 기도하고, 자신을 단순히 유배의 희생자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그곳으로 보냄을 받은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비록 고통스럽고 불쾌했지만 바벨론의 이름과 문화를 수용한 이유는 그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렵고도 분별력이 필요한 이 선택의 결과로 그들은 바벨론을 섬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바벨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고,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나중에는 동료 유대인들의 삶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거절하다


8절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놀라게 됩니다. 다니엘이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거절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많은 것들을 받아들인 후에 왜 음식과 같은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단 말입니까? 다니엘이 음식을 거절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8절에 보면 다니엘은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뜻을 정했다’고 합니다. 음식이 자신을 더럽힌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몇 가지 견해가 있는데요. 첫번째는 율법에 금지한 음식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돼지고기와 같은 음식말이지요. 하지만 이 설명은 포도주까지 거절한 이유를 말해주지 못합니다. 두번째는 바벨론의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단에는 고기만 올라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궁에 공급되는 곡식과 채소가 제단에 올라가지 않은 음식이라고 확신하기 어렵지요. 그리고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나중에 다니엘은 왕궁의 고기와 포도주를 먹었습니다(단 10:3). 다니엘은 이 음식을 평생 거절한 것이 아니라, 바벨론 동화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3년 동안 거절하기로 뜻을 정한 것이지요.


세번째 견해는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제공하는 목적이 그들을 바벨론의 신앙과 세계관에 동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바로 그것을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왕이 하사한 음식들은 그들의 생전에 처음 먹어보는 진귀하고 맛있는 음식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과 세 친구는 그 음식들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기로 뜻을 정합니다. 왜냐하면 느부갓네살 왕이 자신의 진미를 제공하는 이유가 다음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를 다스리고 공급한다. 너희는 나의 통치와 공급에 의존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여호와는 더이상 너희의 신도 아니고 공급자도 아니다. 그러니 나를 섬겨라.” 이것이 바벨론 동화 프로그램의 의도였습니다.


다니엘, 뜻을 정하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그들이 제공하는 프로그램은 수용하되, 그들이 요구하는 사람은 되지 않겠다고 뜻을 정한 것입니다. 7-8절에 흥미로운 표현이 나옵니다. 7절에서 “고쳤다”, “~이라 하고”라는 말은 같은 단어인데, “정했다”라는 뜻입니다.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정했다’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정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정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정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정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8절을 보면, 다니엘도 뜻을 “정했다”고 말합니다. 지금 다니엘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바벨론이 자기들의 신앙, 사상, 가치관으로 우리를 바꾸려고 ‘정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나도 뜻을 ‘정했다.’”


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 바벨론의 삶을 부정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벨론으로 보내셨기에, 여기에서 그들의 학문과 언어를 배우고, 그들의 이름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신앙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먹을 수 있고 즐길 수 있지만, 먹지 않고 즐기지 않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왕이 주는 진미와 포도주의 맛과 즐거움에 빠지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다른 것들이 나의 신이 되지 않게 하겠다, 나를 다스리게 하지 않겠다, 나의 공급자가 되지 않게 하겠다는 뜻을 정한 것입니다.


다니엘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며 세상 사람들을 돌보고 섬기는 사람이 되겠지만, 세상이 주는 달콤함과 즐거움에 빠지지는 않겠다고 선을 그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세상의 말을 듣고 이해하기 위해 배울 것이고, 세상을 섬기는 사람이 되겠지만, 세상에 빠져서, 세상에 취해서 살아가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니엘과 세 친구가 정한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고 공급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과 세 친구가 환관장으로부터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뜻을 정한대로 3년 동안 채소와 물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셔서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셨습니다. 특별히 다니엘에게는 모든 이상과 꿈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다니엘과 세 친구는 가장 탁월한 자들로 왕 앞에 서게 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다니엘과 같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세상의 즐거움을 포기했더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성공하게 해주셨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바벨론에 사로 잡혀온 많은 사람들 중에서 다니엘과 같이 신앙을 지키기로 뜻을 정했던 모든 사람들이 다니엘과 같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니엘은 지금 그리스도인의 성공 비결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다니엘이 정말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강력한 바벨론 제국에서 마치 하나님은 계시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지만,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살아서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보시고 공급하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21절은 다니엘이 고레스 왕 원년까지 생존해 있었다고 말합니다. 고레스 왕은 바벨론을 멸망시킨 바사(페르시아)의 왕입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으로 잡혀온 시점에서 약 70년 후의 일입니다. 그렇게 강력해 보였던 바벨론 제국도 멸망하고, 느부갓네살 왕도 죽었지만,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보존해 주셨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다니엘서 1장은 반복해서 이 사실을 말합니다. 2절에서 ‘주께서 … 붙이시매’, 9절에서 ‘하나님이 …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17절에서 ‘하나님이 … 지식을 얻게 하시며’. 이 말씀들에서 ‘붙이시매, 얻게 하셨다’는 말은 모두 “주셨다”는 뜻의 같은 단어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모든 것을 느부갓네살이 공급하고, 느부갓네살 없이는 바벨론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생각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역사 이면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바벨론의 손에 주셨고,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바벨론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와 긍휼과 지식을 베푸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결론/적용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다음과 같이 적용해 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학생들에게는 성적과 대학이 내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여러분이 나중에 직장 생활을 한다면, 여러분의 직장이, 사장님이, 상급자가 여러분의 삶을 결정짓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의 인생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고, 우리의 생명을 보존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악과 불행을 경험할 때, 과연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나를 버리신 것인가? 세상을 통치하실 능력이 부족하신 것일까? 이런 질문들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다니엘서는 그렇게 보이는 현실에서도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다스리고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신 뜻을 우리가 다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셋째,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세상 속으로 들어가 치열하게 살되, 뜻을 정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십시오. 그리스도인이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해야 할 이유는 더 높아지기 위해서, 더 좋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세상을 잘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자 할 때 우리는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달콤함에 빠져 세상과 같이 될 위험이 늘 있습니다. 다니엘이 뜻을 정한 것처럼, 여러분도 세상을 살되 세상에 빠지지 않기 위해 뜻을 정하십시오. 누가 정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과 같이 여러분 스스로 정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거부하는 것으로 이 선을 그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방식으로 세상에 선을 긋고, 그 이상 넘어가지 않겠다고 뜻을 정하십시오. 세상과 같아지지 않기 위한 원칙을 정하고 지키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뜻을 기뻐하시고 복을 베푸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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