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적인 세상에서 용기 있는 믿음으로 살아가기
다니엘 3:16-27
옛날(2001년) 모 증권 광고에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할 수 있는 친구, 그 친구가 좋다”라는 카피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한다고 생각 없이 투자하지 않고 소신껏 투자하겠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모두가 “예”라고 말할 때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아래 사진은 위키백과에서 가져온 것인데요. 1936년 6월 13일 독일 전쟁해군의 훈련함의 진수식에서 나치 경례를 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동그라미 안에 있는 한 사람이 혼자 팔짱을 끼고 비웃듯 구경하고 있습니다. 이 사진이 공개되면서 그는 “나치 경계를 하지 않은 남자”로 유명해졌는데요. 이 사람의 이름은 아우구스트 란트메서입니다. 그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나치당에 입당했지만, 얼마 후 한 유대인 여성과 결혼하게 됩니다. 이 사진은 이 무렵 찍힌 사진입니다. 사진이 촬영된 후 둘은 덴마크로 도피하려 했지만 실패합니다. 결국 란트메서는 강제수용소로 보내졌고, 아내인 에클러는 베른부르크 안락사 센터에서 살해당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치 경례를 할 때, 홀로 팔짱을 끼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후에 그가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종종 이 세상에서 이와 같이 말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인에게 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차마 용기가 나지 않는데요. 우리는 어떻게 적대적인 세상에서 용기 있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다니엘 3장을 통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적대적인 세상의 압박
다니엘 3장은 느부갓네살 왕이 신상을 만들고 세우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 신상은 금으로 만들어졌고, 아파트 10층 높이(약 27m)에 달하는 거대한 신상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왜 갑자기 이런 거대한 신상을 만들었을까요? 우리는 지난 시간에 느부갓네살이 꿈에서 ‘한 큰 신상’을 보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신상은 머리만 금으로 되어 있었고, 나머지 부분은 각가 다른 재료로 만들어졌습니다. 그 의미는 느부갓네살의 시대, 바벨론의 시대가 지나가고 다른 왕, 다른 제국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뜻이었지요. 당시에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꿈과 해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내가 세운 황금의 제국이 망하지 않고 영원하길 바랐겠지요. 머리만 금이 아니라 머리부터 발 끝까지 금으로 된 큰 신상은 이러한 느부갓네살의 야망을 잘 보여줍니다.
느부갓네살은 이 신상을 두라 평지라는 곳에 세웁니다. 그리고 낙성식에 모든 관원을 참석하게 합니다. 그리고 왕의 명령을 반포하는 자가 큰 소리로 외치니다. “모든 백성들아, 왕이 너희에게 명하시니 모든 악기들이 연주될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않는 사람은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을 것이다!” 이 명령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느부갓네살에게 절대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정복한 나라의 종교화 문화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느부갓네살의 명령보다 우선이 될 수 없었습니다. “너희가 믿고 싶은 신을 섬겨도 좋다. 하지만 나의 신상에게 절하고 나서 그 신을 섬겨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신교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요구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만을 유일한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는 유대인들에게는 타협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왕의 요구를 따르려면 십계명의 제1계명을 어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 이 명령은 매우 큰 압박으로 다가왔습니다. 1-7절을 보면 그 분위기가 잘 느껴집니다. 몇 가지 주목할 만한 특징이 있는데요, 먼저 느부갓네살의 이름이 자주 언급됩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을 수 있지만, 당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란 이름은 엄청난 권위와 무게가 있는 이름이었습니다. 그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사람들을 고개를 숙여야 했지요. 다음으로 반복되는 명단들입니다. 낙성식에 참석하는 고위 관료의 명단을 반복해서 언급하고 뒤에 ‘모든’ 관원이라고 덧붙입니다. 연주되는 악기의 명단도 반복하여 말하며, 꼭 ‘모든’ 악기라고 말합니다.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자의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자들이 금 신상에게 절을 했다고 합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금 신상에게 절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이런 압박감만으로 끝나는 일이면 그래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는 실제적인 죽음의 위협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세 사람이 직면한 상황이었습니다. 바벨론의 적대적인 명령과 압박, 위협 앞에서 있는 세 사람은 오늘날 적대적인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 것을 인정해 줍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것만이 진리라고 말하지는 말라고 합니다. 전도를 하면 기독교를 강요하지 말라고 합니다. 성경에 근거해서 어떤 윤리적인 주장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종교는 개인적 신념일 뿐이니 사회적 통념과 가치에 도전하여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을 때에만 인정하겠다는 것이지요. 그런 얘기는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하고, 세상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의 목소리는 크고 강하고 힘이 있지요. 우리는 눈치를 보게 됩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살아가기
이렇게 적대적인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세상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거대한 금 신상 앞에 모든 고위 관료와 백성들이 절하는 모습에 압도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신상’이란 단어를 주목해서 보십시오. 이 신상은 왕이 ‘만든’ 신상(1, 15절)이고 왕이 ‘세운’ 신상(1, 2, 3, 5, 7, 12, 14, 18절)이라고 말합니다. 다니엘은 지금 이 일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지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파트 10층 높이의 금으로 만든 신상, 왕이 명령하고 나라의 고위 관료들이 모두 나와서 성대하게 시행된 낙성식 중심에 있는 그 신상은 ‘가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만든 것에 불과합니다. 사람이 세워주지 않으면 혼자 설 수도 없습니다. 화려하고 능력있어 보이지만, 지나가는 새가 그 위에 똥을 싸고 날아가도 피하지도,닦지도 못하는 무능력한 신상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믿고 따르라고 하는 것들은 만들고 세워진 신상과 같습니다. 겉으로 대단해 보이고, 뭔가 답을 주는 것 같지만, 그 안을 들여다 보면 거기에는 진리가 없고, 공허합니다.
다음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온전한 믿음입니다. 온전한 믿음이야말로 적대적인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느부갓네살 왕 앞으로 끌려갑니다. 그들은 신상에 절하지 않았고, 그 사실을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왕에게 고발했기 때문입니다. 왕은 분노하여 세 사람을 끌고 오게 하였지만, 관대하게 한 번 더 기회를 줍니다. 실수라고 생각해 줄테니 잘 준비하고 있다가 다음에 악기 소리가 들리면 내가 만든 신상에 절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만일 절하지 않는다면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버릴 것인데, 과연 내 손에서 너희를 건져낼 신이 있겠느냐?”
느부갓네살의 질문에 대한 세 친구의 답변이 16-18절에 나옵니다. 이 답변은 세 친구의 믿음, 곧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이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는데요. 먼저 17절을 보면 세 친구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실 것입니다.”라고 답합니다. 먼저 세 친구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능히 풀무불에서도 왕의 손에서도 우리를 건져내실 수 있는 분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두번째로 세 친구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고 대답합니다. 세 친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자유를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은 풀무불에서도, 왕의 손에서도 능히 건져내실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지금 우리를 풀무불에서 건져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이 두번째 요소를 믿음 없는 사람의 태도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구원해주실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지요. 나에게 이런 확신 있는 믿음이 있으니 응답해주실거라는 자기 믿음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것은 마치 자판기에 돈을 넣으면 음료수가 나와야 한다는 일종의 종교 메커니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는 불신의 표현이 아닙니다. 선하고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가 기도하는대로 응답해 주시지 않아도, 선하시고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내 생각보다 더 좋은 뜻과 계획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정말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정말 우리에게 유익한지 모릅니다. 하지만 나보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가 잘못되었음을 아시고, 거절하실 수 있다면 우리는 두려움 없이 더 큰 확신을 갖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로 세 친구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실지는 모르지만,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결코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왕이 세운 신상에게 절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라는 대답입니다. 세 친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위해 나타내 보이신 뜻을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감춰진 뜻은 알 수 없지만, 나타내신 뜻, 곧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은 분명하게 알았지요.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감춰진 뜻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하신 뜻에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연약한 믿음에 용기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하지만 우리는 세 친구와 같은 용기 있는 믿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연약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적대적인 세상 속에서 용기 있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주님께서 힘과 위로를 주십니다. 느부갓네살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명령을 내립니다. 풀무불의 온도를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겁게 하라고 합니다. 세 친구를 더 고통스럽게 죽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너희가 말하는 그 하나님이 내 손에서, 이 풀무불에서 너희를 건져낼 수 있는지 두고 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곱 배나 뜨거워진 풀무 속으로 세 사람은 던져집니다. 그리고 그때 느부갓네살은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됩니다. 분명히 불 가운데 던진 사람은 세 사람이었는데, 네 사람이 불 가운데서 돌아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네번째 사람은 마치 ‘신들의 아들’과 같았습니다.
‘신들의 아들’은 누구일까요? 성자 하나님께서는 성육신 하시기 이전에도 구약 시대에 여호와의 사자라는 이름으로 자기 백성 가운데 오셔서 함께 하셨습니다. 본문의 네 번째 사람도 우리는 성육신 하시기 이전의 성자 하나님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요? 성자 하나님께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있는 불 가운데로 들어오셔서 함께 하고 계십니다. 랄프 데이비스라는 주석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풀무불에서 꺼내 주시지 않고, 그 안에서 그들을 찾으셨다. 그분은 우리를 모든 고통과 위험에서 항상 보호해 주시지는 않지만, 넷째 사람은 고독과 배신과 상실의 순간에 다가오셔서 우리와 함께 걸으신다. 그는 우리에게 물과 강과 불을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끝까지 우리를 지키실 능력이 있으시다. 넷째 사람은 항상 자기 백성을 찾으실 수 있다.”
우리 예수님은 정말 놀라운 구세주이십니다. 그분은 불 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불 가운데로 들어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불 밖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지 않고, 불 속에 들어와 불 가운데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건져주시지 않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적대적인 세상은 너무 크고 강하게 보이고, 우리의 믿음은 작고 초라해 보일 때, 불 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비록 우리는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뜻과 계획을 다 알 수 없지만, 나보다 나를 잘 아시는 가장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하신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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