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16-17장은 요셉 자손(에브라임과 므낫세 반)이 제비 뽑아 얻은 땅의 범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지파에게 나눠주신 땅은 완전히 정복된 땅이 아니었습니다. 여리고나 하솔과 같이 크고 중요한 성읍들과 그 근방에 땅들은 정복되었으나 여전히 가나안 땅 곳곳에는 정복해야 할 성읍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아직 차지 하지 못한 땅까지 포함하여 각 지파에 분배하신 이유는 그 모든 땅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남은 땅을 정복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땅 분배와 관련한 이 단락의 곳곳에서 남은 땅을 정복하는 일이 매우 더디게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게셀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않았습니다(수 16:10). 이어지는 설명은 가나안 사람들이 에브라임 가운데 거하며 사역하는 종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에브라임 지파가 게셀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만약 그들이 가나안 사람들을 그들이 부리는 종으로 삼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그것은 그들의 편의를 위해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을 온전히 좇지 않은 것이 됩니다. 또 므낫세 지파는 벧스안을 포함한 여섯 성읍의 가나안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했고, 그러자 가나안 사람들은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습니다(17:11-12). 므낫세 지파가 이들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3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다고 말씀합니다. 이들은 그들이 가나안 거민들을 쫓아내기에 아직 힘이 모자란다고 평가한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가나안 사람을 내쫓지 않고 내버려두었다가 에브라임 지파와 같이 그들을 부리는 종으로 삼습니다. 남은 성읍을 정복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보다 그들 자신의 힘과 능력을 더 결정적인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14-18절의 이야기는 에브라임과 므낫세 자손의 이러한 불신앙적 모습들을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여호수아에게 나아와 더 많은 분깃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들의 요구는 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요구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한 편으로는 바람직한 요구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도 그들이 분배받은 땅이 좁으니 브리스와 르바임 사람의 삼림에 올라가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 자손 난색을 표합니다. 브리스와 르바임 사람에게는 철병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에브라임 지파의 이러한 현실주의적, 편의주의적인 태도에 여호수아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들을 도전하고 격려합니다.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 내리라.”(18)
여호수아의 이 말은 ‘이미’와 ‘아직’ 사이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도전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 약속을 통해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됩니다(벧후 1:4). 하지만 요셉 지파와 같이 우리는 우리 육신의 편의를 위해, 또는 우리의 현실에 안주하여 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높은 이상에 미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여호수아는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바라보라고 도전합니다. 바라볼 뿐 아니라 그것을 취할 것을 격려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지 맙시다. 그 약속을 우리의 것으로 취하여 누릴 때까지 결코 만족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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