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 작성자 사진병철 안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작성의 역사적 배경(1)

최종 수정일: 2021년 8월 10일





들어가면서

여러분, 안녕하세요? 지난 주에 예고한 대로 오늘부터 몇 주 동안 교회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려고 합니다. 특별히 이번 성경학교 기간을 통해 다루려고 하는 부분은 종교개혁의 역사입니다. 일반 세상의 역사도 역사의 주체가 되는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분류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한반도에서 일어난 역사를 한국사라고 부릅니다. 또 한국사를 각각의 시대에 따라 고대사와 중세사, 근세사와 현대사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역사도 시대 별로 나눌 수 있는데,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교회사 가운데서도 유럽의 종교개혁의 역사, 그 중에서도 영국의 종교개혁과 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역사에 대한 것입니다. 이 주제를 선택한 이유는 우리가 배우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을 통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만들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소요리문답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경건한 믿음의 선조들의 피와 땀, 눈물 속에서 만들어진 귀한 유산임을 알게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 작성되었던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대해 알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16세기 유럽 대륙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종교개혁”이란 무엇일까요? “종교개혁”이라고 할 때 여기서 말하는 종교란 기독교를 의미합니다. 오늘날 종교라고 하면 우리는 다양한 종교들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1500년대 유럽의 종교는 기독교였어요. 따라서 16세기 유럽에서 종교를 개혁했다는 것은 기독 교회를 개혁한 일을 말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개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개혁은 원래의 것으로 돌아가는 것, 본래적인 것의 회복을 말합니다. 특별히 당시 교회(중세 로마교회)의 신앙과 삶이 초대 교회 당시 사도들의 가르침, 곧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심각하게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잘못된 신학과 의식에서 돌이켜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중세 교회의 부패

그렇다면 당시 교회(중세 로마교회)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던 걸가요? 대표적인 것으로 사제주의가 있습니다. 사제란 하나님과 신자 사이를 이어주는 일종의 제사장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제사장이 필요한가요? 소요리문답을 통해서 배운 것처럼, 성경은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대제사장이 되신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드리신 단번의 피의 제사로 더 이상 제사도, 제사장도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 안에는 성직자들을 사제, 제사장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중세 교회에는 사제를 통해서, 사제의 도움을 받아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잘못된 가르침이 가득차게 되었어요.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러한 사제들 사이에 하나의 위계질서가 생겨나게 되었어요. 가장 계급이 낮은 부제가 있고 그 위에 사제, 사제 위에 주교, 주교 위에 대주교, 대주교 위에 교황이 자리하는 계급체계가 생겨나게 되었어요. 물론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성직자가 될수록 더 강한 힘을 갖게 되었어요. 다른 사제들을 다스리는 권한이나 교회의 중요한 의사를 결정하고, 또 사제를 임명하거나 면직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고, 그 힘을 휘두를 수 있게 된 거예요. 특별히 이 계급체계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교황의 권위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었어요. 그래서 교황이 공식적으로 선언한 문서는 결코 오류가 없다는 ‘교황무오설’을 주장하기도 했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중세 로마교회의 이런 모습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맞다고 생각하나요? 그렇지 않지요. 그래서인지 중세 교회는 신자들에게 성경을 빼앗았어요. 따라서 일반 신자들은 성경을 읽을 수 없었고, 주일에 미사에서 사제를 통해 듣는 것이 전부였어요. 하지만 그마저도 라틴어로 된 것이었어요.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던 독일의 문맹률은 95%였고, 라틴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0.5%로 안 되었다고 하니 사실상 보통 신자들은 성경에 대해 무지할 수 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리고 성경에 대한 이러한 무지로 인해 교회 안에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복음이 대세를 이루기 시작했어요. 특별히 구원과 관련하여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즉, 로마교회는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만으로는 부족하며 사람 편의 공로가 더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금욕이나 마리아와 성자 숭배, 선행 등을 통해 쌓은 공덕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더해짐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에 대한 잘못된 교리로부터 나온 현상 중 대표적인 것이 마리아 숭배와 면죄부 판매입니다. 중세 로마교회는 이 땅에서 많은 선을 행하고 공덕을 쌓은 성인들은 자신이 쌓은 공덕을 다른 사람들에게 양도할 수 있다고 가르쳤어요.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교회 역사 가운데 가장 많은 공덕을 쌓은 사람은 누구인 것 같나요? 중세교회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라고 생각했어요. 따라서 마리아를 잘 숭배하면 그가 쌓은 공로를 우리의 것으로 가져올 수 있다고 가르쳤어요.

면죄부(혹은 면벌부)도 마찬가지였어요. 면죄부라는 무엇일까요? 중세 로마교회에는 죄를 지은 사람이 사제에게 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흔히 “고해성사”라고 하는 제도입니다. 죄를 고백하면 사제는 그 죄에 대한 일종의 벌(보속)을 부과했고, 죄를 지은 사람은 회개의 표현으로 그 벌을 받아야 했어요. 그런데 무득이한 사정으로 벌을 받을 수 없을 때 그는 벌금을 내었고 그에 대한 영수증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면벌부의 시작입니다. 시간이 지나자 면죄부를 교회로부터 직접 사는 식으로 바뀌었고, 종교개혁 당시 유럽에서는 교황의 대리인들이 면벌부를 판매했습니다. ‘회개’를 돈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금고 안에 동전 한 닢이 떨어질 때 한 영혼이 연옥에서 솟아오른다.”

종교개혁의 시작

이것이 16세기 교회의 형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종교개혁의 불을 지핀 것은 독일 출신의 마르틴 루터(1483-1546)입니다. 루터는 로마교회의 사제였습니다.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얻어 교수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루터는 시편과 로마서를 강의하는데, 그 과정 속에서 복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루터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구원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고민해 온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성경을 연구하는 가운데에서 구원이 인간의 노력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참된 복음을 발견한 루터에게 ‘면죄부 판매’는 너무나 터무니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1517년 10월 31일에 면죄부 판매의 부당함에 대해 쓴 ‘95개조 반박문’을 써서 비텐베르크 성에 게시했습니다. 이 글에서 루터는 성경이 말하는 참된 회개의 의미를 설명하고 면죄부의 무효를 주장합니다. 사제에게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것과 인간의 노력을 통해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줄 수 있는 유일한 분임을 밝혔습니다.

루터가 라틴어로 쓴 95개조 반박문은 독일어와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서 인쇄본이 유럽 각처로 보급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얼마 전 발명된 인쇄술이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인쇄된 루터의 글은 유럽 전체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참된 회개가 전 유럽을 휩쓸며 급속도로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루터와 루터가 쓴 95개조 반박문에 대한 엄청난 반대와 저항도 함께 따라왔습니다. 그럼에도 루터는 굴복하지 않았고, 계속된 저술활동과 토론을 통해 교회 개혁의 불을 지폈습니다.

그리하여 유럽 대륙 각지에서 교회 개혁 운동이 전개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가 속한 개신교회가 생겨납니다. 독일에서는 루터와 루터의 후계자인 멜랑히톤에 의해 개혁이 추진되었습니다. 또 스위스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던 지역인 취리히에서는 츠빙글리(1484-1531)와 그의 후계자 불링거(1504-1575)에 의해, 스위스의 프랑스어 사용 지역이었던 제네바에서는 기욤 파렐(1489-1565)과 존 칼빈(1509-1564), 데오도르 베자(1519-1605)에 의해 교회 개혁이 이루어졌고 개혁 교회로 이어집니다. 또 스코틀랜드의 경우 존 낙스(1515-1572)에 의해 개혁이 이루어져 1560년 장로 교회가 정착되었습니다. 또 잉글랜드에서는 국왕인 헨리 8세가 자신의 이혼문제로 로마교회와의 관계를 끊어버리면서, 국교회(성공회)가 출발합니다. 우리가 좀 더 관심을 가지려고 하는 지역은 영국입니다.

영국의 종교개혁: 헨리 8세부터 메리여왕까지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문에 내 건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시작된 교회 개혁이 유럽 대륙을 휩쓸고 있을 때 영국에도 마르틴 루터가 쓴 책들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로마 교황이 루터의 책들을 불사르고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서는 그 책의 인기가 계속 올라갔습니다. 동시에 잉글랜드 글로스터셔 출신의 윌리엄 틴데일(1494-1536)이라는 학자가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하여 독일의 보름스에서 영어로 된 신약 성경을 출간했습니다. 이렇게 번역된 영어 성경은 수천 부씩 인쇄되었고, 은밀하게 잉글랜드로 들어왔습니다. 처음에 살펴본 것처럼 영국에서도 성경은 사제들만의 전유물이었지만, 이제 영국의 일반 백성들에게 까지 널리 읽혀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주교들에게 틴데일이 번역한 성경은 위험한 책이었고,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자와 함께 불태워야 할 것들로 여겨졌습니다. 틴데일 역시 1535년에 붙잡혔고 이듬 해에 화형 당하고 말았습니다. 틴데일은 죽어가면서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여, 잉글랜드 왕의 눈을 열어 주소서!”

틴데일이 말한 잉글랜드 왕은 헨리 8세(재위 1509-1547)는 잉글랜드를 로마 교회에 충성하던 국가에서 영어로 된 성경을 읽고 설교하는 나라로 바꾸어 놓습니다. 틴데일의 기도가 응답된 것일까요? 당시 영국의 왕 헨리 8세는 로마 교회와 나쁘지 않은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 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하게 된 것은 자신의 이혼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헨리 8세는 그의 아버지 헨리 7세의 둘째 아들이지만, 형이 죽자 왕위를 이어 받으면서 동시에 형수인 캐서린과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캐서린이 왕위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하자, 그녀와의 결혼을 무효화하려고 하는데, 교황은 이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캐서린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카를 5세의 고모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헨리 8세는 로마 교회와 단절하고 앤 볼린과 결혼한 후, 1536년에 ‘수장령’을 발표합니다. 즉, 교황이 아니라 잉글랜드의 왕인 자신이 잉글랜드 교회의 유일한 수장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 일의 배후에는 캔터베리 대주교인 토머스 크랜머(1489-1556)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잉글랜드에서의 종교개혁의 시작이었습니다. 이것이 시작일 뿐인 것은 헨리 8세가 로마 교회와 분리를 선언하긴 했지만, 여전히 교리와 예식에 있어서 로마 교회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이처럼 로마 교회와 단절하고 결혼한 앤 볼린과의 사이에서 후에 여왕이 될 엘리자베스를 낳지만 원했던 아들을 갖지 못하자 그를 처형시키고, 세 번째 부인인 제인 세이모어와 결혼하여 비로소 아들을 갖게 되고 헨리 8세는 1547년에 사망합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에드워드 6세가 잉글랜드의 왕위를 잇습니다. 잉비록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지만, 에드워드는 경건한 왕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직접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하지는 못했지만, 토머스 크랜머의 주도 하에 에드워드의 통치기간 동안에 교회 개혁이 이루어졌고, 개혁자들은 에드워드 6세를 ‘어린 요시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영국에 있던 개신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니콜라스 리들리, 마일즈 커버데일, 존 후퍼)을 주교로 임명하였고, 그의 통치기에 유럽 대륙의 탁월한 개혁자들(피터 마터 버미글리, 마르틴 부처, 요한 아 라스코)을 영국으로 초빙하여 신학교에서 가르치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개신교도 왕이었던 에드워드 6세의 통치 기간에 영국의 교회 개혁은 더욱 빠르게 이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병약했던 에드워드 6세는 16세의 어린 나이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이어 에드워드 6세의 이복 누나인 메리가 왕위를 잇습니다. 메리의 별명이 있습니다. ‘블러드 메리’입니다. 피투성이 메리, 비범벅 메리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왜 메리에게 이러한 끔찍한 별명이 붙은 것일까요? 메리는 헨리 8세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캐서린의 딸입니다. 캐서린은 로마교회를 신봉했던 스페인의 공주로 로마 가톨릭을 신봉했고, 그의 딸인 메리 역시 로마 가톨릭 교도로 자라왔습니다. 특히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 헨리 8세에게 버림을 받고 반 감금 상태로 보내야 했기에, 자연스럽게 그의 마음에는 헨리 8세와 개신교에 대한 반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왕위에 오른 메리는 5년 간 영국을 통치하면서 헨리 8세가 수장령을 발표하기 이전으로, 즉 로마교회로의 복귀를 추진합니다. 교황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이단 단속령’을 내려 수 많은 개신교인들을 핍박하고 학살합니다. 헨리 8세 때부터 영국 교회의 개혁을 주도 했던 토마스 크랜머와 같은 이들, 또 여러 개혁자(니콜라스 리들리, 존 후퍼, 휴 라티머), 일반 성도들이 화형대에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박해를 피해 수백명의 사람들이 영국을 떠나 취리히나 바젤, 스트라스부르 같은 개신교 도시로 망명해야 했습니다.

리들리와 라티머의 죽음에 관련한 일화가 있습니다. 1555년 그들이 서로 등을 맞대고 함께 불 속에서 죽어가고 있을 때, 나이 많은 라티머가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리들리 선생, 마음 편히 먹고 사나이 답게 행동하시게.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은혜로 잉글랜드에서 이런 촛불을 밝히네. 나는 누구도 이 촛불을 끄지 못하리라고 믿네.” 또 같은 곳에서 토머스 크랜머가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는 헨리 8세 때부터 잉글랜드의 교회 개혁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메리 여왕 때에 박해를 인해 잠시 자신이 믿는 개신교를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토마스 크랜머는 그 동안 교회 개혁을 위해 많은 일을 했기 때문에 그를 죽여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사형 집행일이 되었을 때에 크랜머는 그는 자신이 믿는 신앙을 비겁하게 저버렸지만, 자신은 분명 개신교인이라고 담대하게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내 손이 죄를 지어 내 마음을 거스르는 글을 썼으니, 내 손이 먼저 그에 따른 벌을 받게 하리라.”고 말하며, 개신교 신앙을 철회한다고 서명했던 손을 먼저 불에 내밀었고 담대히 불에 타 죽었습니다. 이처럼 메리 여왕의 박해 가운데 수 많은 개혁자들과 개신교인들이 죽어갔지만, 그들의 죽음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눈물 짓게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영국의 교회 개혁은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후 영국의 교회 개혁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요? 다음 주에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회수 634회댓글 0개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Comentarios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