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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병철 안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작성의 역사적 배경(2)

최종 수정일: 2021년 8월 15일



여러분, 안녕하세요. 지난 시간에 이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작성의 역사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중세 유럽 교회의 부패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그리고 그런 상황 속에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문에 붙인 95개조 반박문에 의해 시작된 유럽의 종교개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그리고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열렸던 영국에서의 종교개혁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유럽에서의 종교개혁과 영국에서의 종교개혁에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교회 개혁을 주도했던 루터나 츠빙글리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 복음에 대한 열정과 확신 속에서 개혁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루터는 죄인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가라는 깊은 고민 속에서 로마서를 연구하는 가운데,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고해성사나 금욕,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신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교회의 돌아보았을 때에 교회는 모든 면에서 성경의 가르침에서 멀리 떠나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열정 가운데 개혁을 진행해나갔습니다.

하지만 영국에서의 개혁은 조금 달랐지요? 영국에서는 헨리 8세라는 왕에 의해 시작되었어요. 자신의 후계자를 낳지 못하는 아내와의 이혼을 무효로 만들고자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로마 교회와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자기 스스로를 영국교회의 수장으로 선언하면서 영국의 교회 개혁은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고 보급하는 일에 온 삶과 목숨을 내놓았던 윌리엄 틴데일 같은 인물도 있었고, 또 유럽의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에 호의를 품고 있던 토마스 크랜머 같은 사람이 헨리 8세 곁에 있었습니다. 특별히 토마스 크랜머는 헨리 8세와 그 아들이었던 에드워즈 6세를 가까이에서 섬기면서 영국 교회의 개혁을 주도했던 인물입니다.


영국의 종교개혁: 튜더 왕가(에드워즈 6세부터 엘리자베스 1세까지)

헨리 8세가 죽고 경건한 개신교 왕이었던 에드워즈 6세 때에 영국의 개혁은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로마 교회의 부패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교리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잘못된 교리를 가르침으로 많은 신자들이 성경에 무지하거나 구원에 대한 잘못된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것 같았습니다. 둘째는 교회의 질서입니다. 주로 직분에 관한 것입니다. 당시 교회 안에는 잘못된 위계가 있었습니다. 주교 제도입니다. 교황으로부터 시작하여 일반 사제와 부제가 있었고, 또 그들은 일반 신자들보다 더 우위에 서 하나님과 일반 신자들 사이를 중보하는 존재인 것처럼 행동하며 떠받들어 졌습니다. 셋째는 예배 의식의 부패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난 예배가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성찬식이라고 불리는 예식을 제사라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교회 개혁은 이 세 가지 부분에서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잘못된 예배를 조금이라도 개혁하기 위해서 일종의 예배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공동 기도서(1549/1552)를 따라 보다 더 성경적인 예배 의식으로 예배할 것을 명령했어요. 당시 로마 교회에서 전해 내려오던 잘못된 미사가 아니라 보다 더 성경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한 것이지요. 그래서 예배를 가리켜 ‘미사(제사)’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였고, 사제들이 입던 예복을 폐지하였어요. 또 라틴어가 아닌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영어로 예배하게 하기도 했어요. 또 성직자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규정했습니다. 성직자는 하나님과 일반 신자 사이를 잇는 사제(제사장)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며, 성례를 집행하는 자라는 것을 명확하게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에드워즈 6세가 죽은 해인 1553년에는 만들어진 42개조(Forty-two Articles)라는 신앙고백서입니다. 이 신앙고백서는 토마스 크랜머와 리들리,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의 도움을 받아 만든 것인데, 이를 통해 우리가 믿는 바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에드워즈 6세 때에 영국 교회는 많은 개혁을 이뤄냈지만, 안타깝게도 에드워즈 6세는 왕위에 오른 지 6년 만에 사망하고 그의 이복 누나인 메리가 영국의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메리의 별명이 있습니다. ‘블러드 메리’입니다. 피투성이 메리, 비범벅 메리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왜 메리에게 이러한 끔찍한 별명이 붙은 것일까요? 메리는 헨리 8세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캐서린의 딸입니다. 캐서린은 로마교회를 신봉했던 스페인의 공주로 로마 가톨릭을 신봉했고, 그의 딸인 메리 역시 로마 가톨릭 교도로 자라왔습니다. 특히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 헨리 8세에게 버림을 받고 반 감금 상태로 보내야 했기에, 자연스럽게 그의 마음에는 헨리 8세와 개신교에 대한 반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왕위에 오른 메리는 5년 간 영국을 통치하면서 헨리 8세가 수장령을 발표하기 이전으로, 즉 로마교회로의 복귀를 추진합니다. 교황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에드워즈 6세 때에 제정된 법을 폐지하였습니다. 또 ‘이단 단속령’을 내려 수 많은 개신교인들을 핍박하고 학살합니다. 헨리 8세 때부터 영국 교회의 개혁을 주도 했던 토마스 크랜머와 같은 이들, 또 여러 개혁자(니콜라스 리들리, 존 후퍼, 휴 라티머), 일반 성도들이 화형대에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박해를 피해 수백명의 사람들이 영국을 떠나 취리히나 바젤, 스트라스부르 같은 개신교 도시로 망명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개신교를 탄압했던 메리 여왕은 1558년 11월 17일에 죽음을 맞습니다.

리들리와 라티머의 죽음에 관련한 일화가 있습니다. 1555년 그들이 서로 등을 맞대고 함께 불 속에서 죽어가고 있을 때, 나이 많은 라티머가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리들리 선생, 마음 편히 먹고 사나이 답게 행동하시게.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은혜로 잉글랜드에서 이런 촛불을 밝히네. 나는 누구도 이 촛불을 끄지 못하리라고 믿네.” 또 같은 곳에서 토머스 크랜머가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는 헨리 8세 때부터 잉글랜드의 교회 개혁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메리 여왕 때에 박해를 인해 잠시 자신이 믿는 개신교 신앙을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토마스 크랜머는 그 동안 교회 개혁을 위해 많은 일을 했기 때문에 그를 죽여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사형 집행일이 되었을 때에 크랜머는 그는 자신이 믿는 신앙을 비겁하게 저버렸지만, 자신은 분명 개신교인이라고 담대하게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내 손이 죄를 지어 내 마음을 거스르는 글을 썼으니, 내 손이 먼저 그에 따른 벌을 받게 하리라.”고 말하며, 개신교 신앙을 철회한다고 서명했던 손을 먼저 불에 내밀었고 담대히 불에 타 죽었습니다. 이처럼 메리 여왕의 박해 가운데 수 많은 개혁자들과 개신교인들이 죽어갔지만, 그들의 죽음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눈물 짓게 만들었습니다. 메리의 박해는 잉글랜드 사람들에게 로마 교회에 대한 적대감을 심어주는 결과를 만들어 내고 말았습니다.

메리 여왕이 죽은 후 헨리 8세의 마지막 자식인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릅니다. 개신교도였던 엘리자베스 여왕을 개혁자들은 열렬히 환영합니다. 왜냐하면 헨리 8세의 두 번째 부인이자 엘리자베스의 어머니였던 앤 볼린이 개신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엘리자베스 여왕도 개신교에 호의적일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개신교인들의 기대를 따라 왕이 된 다음 해 엘리자베스는 수장령에 서명하고 영국이 로마 교회로부터 벗어났음을 선포합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나라의 평화와 안정이 필요하다고 보고, 교회와 나라를 위해 ‘중도의 길’을 추구했습니다. 즉, 이복 언니였던 메리는 지나친 로마교회였고, 남동생이었던 에드워드 6세는 지나치게 개신교도 였기 때문에 양편 사이의 극심한 대립이 일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개신교 안에서도 다양한 입장들 간의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치지 않는 종교정책을 펼친 것입니다.

중도주의라는 엘리자베스 왕의 생각을 보여주는 것은 그가 에드워즈 6세 때에 작성된 42개조를 약간 개정한 39개조라는 신앙고백서입니다. 39개조에서 로마 교회의 입장은 거부되었지만, 지나치게 논쟁이 될 만한 교리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기보다 누구나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원만한 입장을 추구합니다. 따라서 개혁자들이 볼 때에 엘리자베스 여왕 통치기의 영국교회의 개혁은 아직도 여러 면에서 부족한 것이었고 많은 아쉬움을 품었고,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교회 정책을 비판하고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을 가리켜 ‘청교도’(Puritan)라고 부릅니다. 당시 ‘청교도’의 대표적인 인물은 토마스 카트라이트라는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분은 당시에도 있었던 주교 제도를 비판했다가 설교권을 박탈당하고 영국 정부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칼빈 목사님의 동역자였던 베자 목사님이 사역했던 제네바로 건너가게 됩니다. 후에는 그곳에서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잘 받아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몰래 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결국에는 체포되어 감옥 생활을 하던 중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카트라이트 목사님의 책과 글들은 이후의 개혁자들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영국의 종교개혁: 스튜어트 왕가(제임스 1세부터 찰스 1세까지)

엘리자베스 여왕을 끝으로 잉글랜드의 왕가가 바뀌게 됩니다. 에드워즈 6세나 엘리자베스가 자녀가 없이 죽었기 때문에 왕위를 계승할 우선순위는 당시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에게 있었습니다. (*영 연방에 대한 설명) 그래서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가 제임스 1세로 잉글랜드의 왕위를 잇습니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개혁자 존 낙스와 앤드류 멜빌을 통해 교회의 개혁이 상당 부분 이루어진 때입니다. 칼빈 목사님이 있던 제네바에서 오래 유학했던 낙스는 스코틀랜드 교회를 개혁합니다. 특별히 낙스 목사님은 제네바에서 공부한 대로 교회를 다스리는 직분은 주교나 사제가 아니라 ‘장로(목사와 장로)’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스코틀랜드 교회의 조직을 ‘장로교회’라는 제도로 개혁합니다. 스코틀랜드는 교리에서 뿐 아니라 교회 질서와 직분, 예배 등 모든 면에서 당시 유럽에서 가장 교회 개혁을 잘 이뤄낸 국가였습니다. 따라서 제임스 6세가 제임스 1세로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을 때에 많은 개혁자들, 청교도들은 많은 기대를 하며 새로운 왕을 맞이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일순간에 실망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제임스 1세가 왕이 되자 잉글랜드의 청교도 목회자들 수백명이 자신의 서명을 담아 제임스 1세에게 청원서를 제출합니다. 잉글랜드의 교회를 스코틀랜드 교회처럼 개혁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이에 제임스 1세는 이 청원을 처리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목회자들의 기대와는 제임스 1세는 달리 청원서에 담은 요구사항 대부분을 거절합니다. 이 회의에서 제임스 1세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발언이 있습니다. “주교가 없다면 국왕도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참석자가 ‘장로회’라는 말을 하자, 왕은 화를 내며 이 말을 했습니다. 잉글랜드에 결코 장로교회를 인정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헨리 8세에 의해 수장령이 선포된 이래로 영국교회는 왕의 임명을 받아 세워진 주교들에 의해 모든 사제들이 임명되고 다스림을 받았습니다. 비록 로마교회처럼 교황은 더 이상 영국교회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지만, 그 자리에 왕과 왕이 세운 주교들에 의해 영국교회는 다스림을 받고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세속 정부가 교회의 영적인 문제에 간섭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개혁자들이나 개신교인들이 볼 때에 잉글랜드 교회는 여전히 개혁되어야 하는 부분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물론 에드워즈 6세나 엘리자베스 같이 교회 개혁에 우호적인 왕이 있을 때에 교회는 조금씩 개혁을 이루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메리나 제임스 1세 같이 로마 교회를 옹호한다든지 교회 개혁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왕이 있을 때 교회는 큰 어려움을 당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제임스 1세에게 스코틀랜드 교회와 같이 잉글랜드 교회도 장로교회를 이룰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하지만 제임스 1세는 그런 주장에 대해 “주교가 없다면 국왕도 없다”고 말하며 격하게 반응한 것입니다. 심지어 제임스 1세는 자신이 왕으로 있었던 스코틀랜드 교회도 장로교회 제도를 포기하고 주교제도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였습니다.

또한 제임스 1세는 오락법(Book of Sports)을 만들었습니다. 이 법은 주일을 의도적으로 범하도록 만든 법입니다. 주일에 오락과 유흥을 즐길 것을 장려한 것입니다. ‘주일에 경건하게만 지내지 말고, 예배 후에 춤도 추고 게임도 하고 활도 쏘며 스포츠도 즐겨라’는 것입니다. 제4계명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을 따라 주일을 에배와 선을 행하는 날로 지키는 것이 청교도들의 대표적인 특징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제임스 1세는 백성들이 말씀을 공부하고 경건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주일을 엄격히 지켜왔던 청교도들의 확산을 막고자 하였습니다. 이 법이 시행되었을 때 잉글랜드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급속도로 타락합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1616년부터 청교도들은 유럽의 네덜란드나 오늘날의 미국인 뉴잉글랜드 등지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제임스 1세에 이어 그의 아들인 찰스 1세가 왕이 됩니다. 우리의 목적지인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찰스 1세 왕 때에 열렸습니다. 찰스 1세가 잉글랜드를 다스릴 때에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열리고 거기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 만들어졌지만, 이 회의는 찰스 1세의 호의 가운데서 열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찰스 1세는 어린 시절을 프랑스에서 보냈습니다. 프랑스는 유럽의 대표적인 절대왕정 국가이자 친 로마 가톨릭 국가입니다. 그곳에서 어린 찰스 1세가 보고 들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따라서 그가 영국의 왕이 되었을 때에 교회는 지금까지 치열한 투쟁을 통해 얻은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교리와 예배, 질서(직제)에 대한 개혁은 어려워졌고, 오히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의식과 제도를 유지하고자 하는 움직임에 반대하며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찰스 1세는 예배당의 동쪽 끝에 제단을 만들라는 지시를 하기도 했습니다. 예배가 아니라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왜 그렇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한 단 번의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드리신 십자가의 제사의 효과는 무한하고 영원함으로 더 이상 다른 제사는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으며, 우리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예배를 드릴 뿐입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미사 또는 제사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의 제사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찰스 1세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것을 흉내내어 영국의 모든 교회 동쪽에는 제단을 만들라고 지시합니다. 뿐만 아니라 유럽 개신교회에서 정죄된 ‘알미니안주의’를 가르치게 하기도 했고, 주일 오후 성경공부를 폐지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자가 자신이 내린 법에 반발하기 일쑤였기 때문입니다. 또 주교를 통해서 제임스 1세 때에 만들어진 오락 법을 모든 설교단에서 반포하게 했습니다. 양심이 있는 주교들은 그것을 거부하다가 주교직을 박탈당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정책을 잉글랜드 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에도 정착시키기를 원했습니다. 스코틀랜드는 존 낙스와 엔드류 멜빌 같은 개혁자들에 의해 오랜 전에 교회 개혁이 잘 이루어졌던 나라입니다. 따라서 스코틀랜드의 반발은 매우 심했습니다. 한 예로,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에 새로운 ‘공동기도서’를 만들어 그것을 모든 교회가 사용하도록 한 일이 있었습니다. 에드워즈 6세 때에도 공동기도서를 만든 일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예식이 많이 남아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개혁자들의 성경적인 신학에 입각한 공동기도서를 만들어 잉글랜드의 교회가 보다 더 바른 예배를 드리도록 장려하였습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바른 예배를 위한 임시적인 방편으로 만든 공동기도서를 유럽에서 교회 개혁이 가장 잘 이루어진 스코틀랜드 교회에 강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분명했습니다. 따라서 스코틀랜드 교회에서는 큰 폭동이 일어납니다. 왕이 보낸 주교가 공동기도서를 따라 예배하려고 할 때에 제니 게데스라는 할머니가 의자를 집어 던지는 사건을 계기로 폭동이 일어났고,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하나로 단결하였습니다. 그리고 온 나라가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맺습니다. 그 언약은 ‘국왕에게 충성하지만,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생명과 재산도 다 바치며 주교제를 거부한다’는 내용입니다.

스코틀랜드에서의 상황이 이렇게 진행되자 찰스 1세는 이것을 왕인 자신에 대한 반역으로 보고 그들을 진압하고 스코틀랜드 교회에 주교 제도를 정착시킬 목적을 가지고 스코틀랜드를 쳐들어 갑니다. 영국 왕과 스코틀랜드 교회 사이의 벌어진 이 전쟁을 “주교 전쟁”이라고 합니다. 이 전쟁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나는데, 전쟁에는 많은 비용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찰스 1세의 군대는 전쟁에서 패배하고 오히려 스코틀랜드 군대가 잉글랜드의 북쪽 지역을 점령하고 배상금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찰스 1세는 의회를 소집합니다. 당시 영국 의회에는 잉글랜드의 청교도들, 특히 장로교인들이 많이 진출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청교도들은 이때야말로 자신들이 엘리자베스 시대 이후로 이루고자 싸워 왔던 영국 교회의 개혁을 이룰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의회에서 본격적인 개혁 작업을 이루어갑니다. 1641년 5월 5일에 찰스 1세를 향한 불만들을 담은 대항변서를 발표합니다. 대항변서에는 교회 개혁과 교회 회의의 필요성, 곧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건하고 신학 지식을 갖춘 신학자들이 모여 회의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1643년 6월 12일에 웨스트민스터회의를 소집하는 법령이 통과되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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