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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병철 안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작성의 역사적 배경(3)

여러분, 안녕하세요. 지난 시간에 이어 오늘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와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작성과 관련한 내용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헨리 8세가 자신의 이혼 문제로 인해 수장령을 선포한 이래로 영국 교회는 계속된 교회 개혁을 이루어왔습니다. 물론 여러 왕들의 정치적, 신학적인 입장에 따라 어느 정도 부침이 있기는 하였지만, 보다 더 성경적인 교회를 향한 개혁의 열망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특별히 찰스 1세 왕의 치하에서 열린 의회는 정치 개혁과 교회 개혁의 기회를 얻게 되는데, 특별히 의회는 교회 개혁과 교회 회의의 소집의 필요성을 느끼고 경건하고 학식을 갖춘 신학자들의 회의를 공개적으로 요청합니다. 그 결과 열리게 된 회의가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입니다.

웨스트민스터는 영국 런던의 서쪽 지역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그곳에 오래된 사원이 있었는데, 런던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웨스트민스터(West: 서쪽 + Minster: 사원)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사원에서 열린 종교회의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웨스트민스터 회의라고 부릅니다.

회의 초반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동쪽 끝 방, 곧 “헨리 7세 예배실”이라고 불리던 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동쪽 끝 방”과 관련해서 기억나는 것이 있지요? 찰스 1세가 왕이 된 후에 내렸던 명령이 있었습니다. “예배당의 동쪽 끝에 제단을 만들라.” 찰스 1세가 내린 이 명령의 배경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동쪽 방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 방을 헨리 7세 예배실이라고 불렀는데, 이 방은 건물 전체에서 가장 밝고 화려한 방이었다고 합니다. 어두운 건물 내부를 지나 이 방에 이르면 주위가 환하게 밝아지면서 신비감을 주었습니다. 3면의 벽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서 빛이 잘 들어왔고, 안쪽에는 금과 상아 장식으로 가득한 방이었습니다. 그런데 찰스 1세가 이 방에 제단을 만들라고 한 것은 어떤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 내기 위한 것이었지요.

그런데 웨스트민스터 총회원들은 바로 이 방에서 모임을 갖습니다. 그러니까 이 방에서 제단을 만들라고 했던 찰스 1세의 명령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마도 그들은 그 방에 있던 제단을 치워버리고 그곳에서 회의를 진행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은 천장이 높아서 목소리가 울려 잘 들리지 않았던 데다가 창문이 커서 겨울이 되자 회의를 갖기에는 너무 춥습니다. 그래서 장소를 옮기게 되는데, 옮긴 방은 서쪽 끝에 있는 벽난로가 있는 방(예루살렘 챔버)입니다. 우리가 웨스트민스터 총회 장면이라고 보게 되는 그림은 이 방을 배경으로 그린 상상화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참석 인원(Divines)은 총 151명이었습니다. 150명 중 목사님들과 신학자들이 120여명이었습니다. 잉글랜드 각 주에서 2명, 웨일즈 각 주에서 1명씩, 채널 제도에서 2명 그리고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각 1명씩, 런던에서 4명, 프랑스 개혁파 교회에서 온 대표 3명 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또 이 외에 상원의원이 10명, 하원의원이 20명이었고,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파견한 대표단 8명이 더 있었습니다. 하지만 151명이 다 참석한 것은 아니고 당시 왕의 편에 서 있던 사람들 30명 정도가 출석하지 않았고, 또 건강 상의 이유로나 다른 일정으로 평균 6-70명 정도되는 인원이 꾸준히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 참석한 사람들 모두는 당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최고의 학식과 신앙을 갖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회의의 의장이었던 윌리엄 트위스는 유럽 대륙의 개신교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또 토마스 가테이커는 대학자로서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뛰어난 학자였습니다. 또 존 애로우스미스와 안토니 터크니는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신학교수가 된 인물이었고 조슈아 호일은 옥스퍼드의 교수가 됩니다. 또 총회의 회원 중 12명 이상이 요리문답 작성자로 이름이 알렸졌던 사람들입니다. 그 밖에도 뛰어난 신학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윌리엄 가우지, 토마스 굳윈, 스티븐 마샬, 에드먼드 칼라미, 허버트 팔머, 제레미야 버로우즈, 윌리엄 그린힐 등이 참여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왔던 사무엘 루더포트나 조지 길레스피도 매우 경건학고 박식한 신학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리처드 백스터 목사님은 이 회의에 대해 평가하면서 “사도시대 이후 지금까지 어떤 종교회의도 이처럼 탁월한 신학자들로 구성된 경우는 없었다.”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1643년 7월 1일부터 1649년 2월 22일까지, 총 5년 7개월 22일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회의 기간 동안 총 1,163번에 걸쳐 모임을 가졌는데, 토요일과 주일을 제외하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거의 매일 모임을 갖습니다. 회의는 아침 9시 시작하는데, 매 주 첫 회의 시작 전에는 다음과 같이 선서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일치한다고 믿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교리도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평화와 건덕을 위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것 외에는 그 어떤 제도도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또 매일 회의를 시작할 때에는 철저하게 경건회를 갖습니다. 경건회에서 그들은 함께 기도를 하고 시편 찬송을 부르기도 하며, 설교를 듣고 때로는 금식 기도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회의의 어느 날, 존 화이트라는 목사님이 한 시간을 기도 인도를 했고, 필립 나이 목사님은 다시 한 시간을 권면하였으며, 스코틀랜드에서 온 알렉산더 헨더슨 목사님이 다시 한 시간 권면하고 또 기도하고 시편을 부르고 금식하며 다음 날 아침까지 계속한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 8시간 금식기도회를 갖기도 했는데 두 시간 기도 인도한 경우, 한 시간 설교, 다시 두 시간 기도 등으로 진행하였습니다.

경건회가 끝난 후부터 오후 1시나 2시까지 전체 회의를 갖습니다. 이 회의의 전반부에는 중요한 주제들을 의논하고 합의를 이끌어 내고 후반부에는 그 주제에 합당한 성경 본문을 토론하였습니다. 또 오후에는 세 개의 위원회로 나뉘어져서 보다 더 세부적이고 전문적인 토의와 문서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각각의 위원회마다 그 역할에 적합한 인물이 배치되었고, 위원장도 가장 적합한 사람을 골라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위원회에서 만들어낸 결과물은 다음 날 전체 회의에 보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회의를 통해 작성된 문서들은 크게 네 가지, 곧 교회정치, 예배모범, 신앙고백서, 교리문답입니다. 우리가 더 집중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입니다. 신앙고백(신조)은 ‘상징, 표시’를 뜻하는 헬라어 ‘쉼볼론’에서 온 말입니다. 예) 암행어사의 마패. “상인들이 서로 약속한 규칙과 상징을 가지고 거래를 하는 것처럼,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약속된 규칙과 상징이 있는데 그것이 ‘심볼’ 곧 ‘신조’이다.”(아오구스티누스) 이처럼 신앙고백은 우리가 신자라는 것을 밝히는 중요한 표시입니다. 물론 이 신앙고백은 우리 개인이 아니라 항상 교회의 회의가 결정하여 권위를 가진 문서입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웨스트민스터 회의라는 교회 회의를 통해 결정한 신조입니다.

특별히 종교개혁 시대는 신앙고백과 신조의 시대라고 할 만큼 많은 신앙고백들이 만들어진 시대입니다. 왜 그럴까요?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사도들이 가르치고 전해주었던 참된 교리로부터 벗어난 잘못된 교리들을 믿고 가르쳐 왔으며, 그 시대 성도들은 성경과 교리에 대해 무지했고, 그들의 삶과 예배는 무질서와 부패로 얼룩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럽의 여러 종교 개혁자들과 개혁된 교회들은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을 만들어서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들이 무엇인지 분명히 하고, 또 로마 교회나 다른 여러 이단들의 가르침과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진리를 구별할 수 있게 하고자 하였습니다.(도표) 또 신앙고백 작성을 통해 교회가 얻는 유익 중 하나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 간의 연합과 일치를 이룰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신앙고백서를 만든 목적 중 하나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교회의 연합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은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신앙고백서가 가르치는 교리들을 문답의 형태로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교리문답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도 1646년부터 본격적으로 교리문답과 관련한 논의들을 이어갑니다. 문제는 분량이었습니다. 교리문답에 많은 내용을 넣으려고 하니 분량이 너무 길어졌고, 간추리려고 하니 꼭 다루어야 할 내용들을 충분히 다룰 수 없던 것입니다.(“우유와 고기를 한 접시에 정갈하게 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때 바인즈라는 목사님의 제안으로 두 개의 교리문답서를 만들기로 합니다. 대(大)요리문답과 소(小)요리문답, 두 종류의 교리교육서를 만들게 됩니다. 대요리문답서는 성숙한 신자들과 목회자 후보생을 가르칠 용도로 길고 자세하게 만들었고, 소요리문답서는 여러분 같은 어린 신자들이나 이제 갓 신앙을 받아들인 초신자들을 위해 짧고 간단하며, 비교적 쉬운 용어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647년 11월 25일 소요리문답 초안이 완성됩니다. 완성된 소요리문답은 증거성경구절을 첨부하는 작업을 거쳐 1648년 7월 27일에 승인을 받고 인쇄에 들어갑니다. 또 소요리문답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총회에도 보내어져서 7월 28일에 공인을 받습니다. 이후 정치 상황이 변화하면서 잉글랜드에서는 더 이상 웨스트민스터에서 작성된 문서들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스코틀랜드에서 소요리문답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성도들의 교리교육에 큰 유익을 끼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장로교회가 전파되는 곳마다 예배모범, 교회정치, 신앙고백서와 함께 소요리문답도 함께 전파되어 미국과 캐나다, 호주에서 뿐만 아니라 1900년대 초 선교사님들을 통해 우리나라에까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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