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Juman
위그노의 삶과 신앙(2)
프랑수아 2세(b1544, r1559 - d1560)
앙리 2세의 급사로 그의 아들 프랑수아 2세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됩니다. 프랑수아 2세와 이후 왕이 되는 샤를 9세, 앙리 3세는 모두 앙리 2세의 아들로 형제입니다. 앙리 3세는 후사가 없어 발루아 왕조가 끊기고 나바르 여왕 쟌느 달브레의 아들인 앙리 4세가 왕위에 오르며 부르봉 왕조가 시작됩니다.

프랑수아 2세는 본래 허약하고 결핵성 정신병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치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가톨릭 신앙에 충실하였고, 당당한 여장부에 지적이고 타협적이었으나 책략가, 정치가의 소질은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그녀는 딸인 스페인 왕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탄식했는데요. “하나님은 내게 세 아이와 분열된 왕국을 주셨다.” 이것이 당시 프랑스의 상황이었습니다.
프랑스는 가톨릭 세력을 이끌었떤 기즈 가문과 위그노 세력을 이끌었던 부르봉 가문이 권력을 두고 경쟁하고 있었고, 어린 왕을 대신하여 모후 카트린이 섭정을 하고자 했지만, 결국 기즈 가문이 권세를 잡으며 기즈 가문의 로렌 추기경이 교황과 국왕의 권력을 모두 쥐고 사실상 독재자로 군림하였습니다. 기즈 가문에 의해 위그노에 대한 박해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위그노들은 첩자들의 침입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신표’(메로, méreau)를 제작합니다. 신표란 신자임을 증명하는 표로써, 신앙 교육을 받은 성도에게만 지급되었습니다. 신표는 신자의 안전을 보장하는 증표의 기능과 함께 성찬에 참여하는 자격을 표시하는 증표로 사용되었습니다.
위그노에 대한 박해가 지속되던 1560년 초, 위그노 세력이 국가를 장악하기 위해 프랑수아 2세를 납치하고 기즈 공 프랑수아와 그의 동생 로렌의 추기경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칼뱅은 이런 방식의 저항은 오히려 프랑스의 개혁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며 반대하였습니다. 앙부아즈 음모는 결국 실패하였고, 이 일로 많은 위그노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같은 해 11월 프랑수아 2세는 자주 실신을 반복하는 나쁜 증세를 보이다 결국 사망하게 됩니다.
샤를 9세(b1550, r1560 - d1574)
프랑수아 2세의 갑작스러운 병사로 인해 그의 동생 샤를 9세가 뒤를 이어 통치하게 됩니다. 고작 10살의 나이였지요. 카트린 드 메디치는 기즈 가문과 부르봉 가문의 대립을 적당히 이용하며 섭정이 되는데 성공합니다. 1560년이 끝나갈 무렵 위그노들에게 매우 반가운 사건이 하나 일어납니다. 나바르 여왕 쟌느 달브레가 제네바의 베자를 네락으로 초청하여 설교를 듣고, 개혁신앙을 받아들이기로 공식적으로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향으로 프랑스 남부 지역에는 위그노 신앙이 강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가톨릭을 대표하는 기즈 가문과 위그노를 대표하는 부르봉 가문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프랑스의 종교 갈등은 정치적 분열로 이어지는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카트린 드 메디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를레앙에서 삼부회의를 소집하였고, 재상 미셸 드 로피탈은 위기를 극복할 대안으로 구교와 신교의 화해를 추진하게 됩니다. 이에 카트린은 가톨릭과 위그노의 대표자들이 만나 타협을 이루도록 회담을 주선합니다. 푸아시 회담(colloque de poissy, 1561)이라고 하는데요. 샤를 9세와 카트린, 나바르 여왕 잔느 달브레와 그녀의 아들 앙리 나바르가 참석했고, 가톨릭 측에서는 로렌의 샤를 추기경을 포함한 교황 사절단 40명이, 위그노 측에서는 베자를 포함한 12명의 대표자들이 참석하였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문제를 토론으로 해결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동의와 화해를 위해 열린 회담은 서로의 차이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었을 뿐입니다. 한 예로 베자는 가톨릭의 미사(화체설)에 대해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이 땅에서 떨어져 있는 만큼 떨어져 있다”고 말하며, 가톨릭의 화체설과 루터파의 공재설을 거부하였습니다.
푸아시 회담의 결렬에도 불구하고 카트린은 계속해서 가톨릭과 위그노의 화해를 시도하였고, 가톨릭을 자극하지 않는 한도에서 위그노에게 관대한 정책을 취했습니다. 카트린은 도시 밖에서 위그노의 예배를 허락한다는 “생제르맹 칙령”(1562년 1월)을 발표하는데요. 여전히 위그노들에게 많은 제한사항이 있었지만, 이 칙령은 공식적으로 위그노를 인정한 첫번째 공문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와 제네바가 투쟁하는 상황에서 가톨릭과 위그노는 서로를 이단으로 간주하였고, 이단에 대한 관용을 죄악으로 여겼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이 칙령은 대단히 진보적이었습니다. 당연히 가톨릭의 반발이 하늘로 치솟았고, 프랑스는 다시 혼돈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가톨릭 군중이 위그노 교회에 불을 지르고, 남프랑스에서는 격분한 위그노파가 가톨릭교회를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가톨릭과 위그노는 서로 전쟁을 위한 하나의 불씨만을 원하는 것처럼 보였고, 한 사건으로 인해 마침내 가톨릭과 위그노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1562년 3월 1일 주일, 프랑수아 드 기즈가 군대를 이끌고 자신의 영토였던 바시(Vassy)를 지나게 됩니다. 프랑스의 작은 도시였던 바시에는 1561년 10월에 위그노 교회가 세워졌고, 그후 교회는 무척 빠르게 성장하여 그해 성탄절에는 바시와 인근 주변에서 온 위그노 3천 명이 성찬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바시를 지나던 프랑수아 드 기즈의 군대는 한 헛간에 모여 예배하는 위그노들을 발견하였고, 그들을 공격하고 학살했습니다. 이날 74명이 죽고 1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합니다. 베자는 바시의 학살을 비난하면서 “모루가 망치들을 많이 소모시켰다”고 말하였는데요. 모루와 망치 비유는 베자가 자주 사용한 것으로 모루는 위그노 교회를 상징하고 망치들은 가톨릭의 박해를 상징합니다. 삽화를 보면 많은 망치가 모루를 때리지만 결국 소모되는 것은 모루가 아니라 망치임을 보여줍니다.

바시 학살은 위그노들의 마음에 겉잡을 수 없는 저항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 일로 프랑스 전역에 8차에 걸친 종교 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1차 종교전쟁(1562.4. - 1563.3.)은 꽁데 왕자인 루이가 오를레앙을 공격하는 바시 학살은 위그노들의 마음에 겉잡을 수 없는 저항감을 불러 일으켰고,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여덟 번에 걸친 종교전쟁의 불꽃이 타올랐습니다. 이 프랑스 내전에서 가톨릭측은 스페인의 지원을 받았고, 위그노측은 영국과 독일의 지원을 받습니다. 전쟁은 끔찍한 것이지요. 격전을 거듭하면서 프랑스인은 같은 국민, 같은 계급, 때로는 같은 가족끼리 싸웠습니다. 명분은 신앙이었지만, 실상은 전쟁이었기에 양측 모두 살인, 약탈, 강간과 같은 온갖 악행들을 자행하였습니다. 1차 종교전쟁에서 위그노의 지도자였던 나바르 왕 앙투안 드 부르봉이 전사했고, 가톨릭의 지도자였던 프랑수아 드 기즈가 암살당했습니다. 카트린은 양측의 화해를 조정하며 “앙부아즈 칙령”(1563년 3월)을 발표합니다. 그러나 앙부아즈 칙령은 생제르맹 칙령보다 후퇴한 것으로, 이 종교전쟁으로 양측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하였고,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종교전쟁은 서로에 대한 증오와 죄악만을 드러냈을 뿐입니다. 오랜 전쟁은 땅을 폐허로 만들었고, 그들의 신앙과 경건을 말살시켜버렸습니다. 이 종교전쟁 기간 중 기독교 역사상 가장 악명 높고 무시무시한 사건으로 기억되는 “성 바돌로매 축일의 학살 사건”이 일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