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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Lee Juman

위그노의 삶과 신앙(3)

성 바돌로매 축일의 학살 사건(1572)


1562년 3월, ‘바시 학살’ 사건으로 시작된 프랑스 종교전쟁은 1598년 4월 ‘낭트 칙령’에 의해 일단락 됩니다. 되풀이된 전투는 전국을 화염과 창검으로 휩쓸었고 사람들은 질병과 기아에 허덕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프랑스 인구 중 약 3분의 1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수많은 생명과 재산이라는 매우 비싼 대가를 치렀지만, 얻은 것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종교 때문에 시작된 전쟁은 신앙과 경건을 말살해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끔찍했던 종교전쟁 기간 중에서도 가장 끔찍했던 사건은 3차 종교전쟁(1568-1570) 직후 일어났습니다.


1569년 3월 13일 자르낙 전투에서 위그노 진영의 지도자 꽁데 왕자 루이가 전사합니다. 이제 콜리니 제독 혼자 위그노의 사령관 역할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콜리니 제독은 전투보다 군대를 훈련하는 일에 능숙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콜리니가 이끄는 위그노 군대는 몽콩투르 전투(1569)에서 크게 패배하여 절반이 전사하고, 군대는 괴멸되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콜리니 제독은 절망하지 않았는데요. 그는 당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다. 하지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즐거워하는 것 그 자체가 우리의 만족과 행복이 될 것이다.” 콜리니는 즉시 전국을 누비면서 다시 군대를 모집하여 훈련하였습니다. 채 1년이 지나가기 전에 자신이 당했던 것보다 두 배나 더 많은 가톨릭 군대를 격파하고 1570년 평화협정(생제르맹 칙령)을 이끌어내지요.



<가스파르 드 콜리니>


<1569년 몽콩투르 전투>


1572년, 카트린 드 메디치와 샤를 9세는 이 평화를 영구적으로 유지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분쟁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왕실의 오래된 처방법을 사용하기로 하지요. 바로 ‘정략 결혼’입니다. 카트린은 자신의 막내 딸, ‘발루아의 진주’라 불리던 아름다운 공주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위그노 지영의 차세대 지도자, 쟌느 달브레의 아들 앙리 드 나바르의 결혼을 추진합니다. 이 결혼을 통해 카트린은 유력한 기즈 가문을 통제하고 싶었고, 샤를 9세는 어머니의 뜻대로 움직이는 유약한 아들이 아니라 프랑스의 모든 상황을 주관하고 통제하는 명실상부한 왕이 되고 싶었습니다. 위그노들은 신앙의 자유를 원했지요. 하지만 이들이 바랐던 기대와 달리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캄캄한 어두움이었습니다.


<앙리와 마르그리트>


결혼을 준비하는 동안 콜리니는 자주 왕궁에 머물렀습니다. 샤를 9세는 콜리니에게 크게 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콜리니를 ‘이 시대의 최고 지휘관’이라 불렀고, 때로는 심지어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카트린은 아들을 콜리니에게 빼앗길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왕이 제독을 너무 크게 여기고, 나는 너무 작게 여긴다”라고 말할 정도였지요. 카트린은 국정이 콜리니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우려하게 되고, 결국 기즈 가문과 손을 잡고 콜리니 제독을 암살할 계획을 세웁니다.



<콜리니 제독의 암살과 성 바돌로매 학살>


8월 22일 금요일, 위그노의 수장이자 국왕참사회의 핵심으로 격상된 콜리니 장군은 루브르 궁전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한 뒤 자택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때 건물 2층에 숨어있던 암살자가 콜리니 제독의 가슴을 저격합니다. 총알은 빗나가고 암살자는 급히 자리를 떠났습니다. 나중에 암살자가 빌린 건물과 그가 도망한 저택의 주인이 기즈 공의 수하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위그노들은 암살의 배후로 기즈 가문을 의심합니다. 카트린과 기즈 가문의 입장에서, 생명을 건진 콜리니 제독은 이전보다 더 위험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든 수많은 위그노들이 격분하여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있었고, 사실이 밝혀질 경우 위그노의 격분이 그들을 향할 것이 분명했으니까요.


8월 23일, 카트린은 아들인 왕에게 모든 진상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제 위그노파를 제거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길이 없다고 말합니다. 샤를 9세는 머뭇거렸지만, 그 또한 격분한 위그노들로 인해 위협감을 느끼고 있던 터라 어머니의 말에 따릅니다. 타반 장군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몹시 신중하고 모후에게 순종적인 샤를 왕은 사태의 전모를 파악한 후 모후와 한편이 되기로 결심하고 (중략) 콜리니를 구할 수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하면서 가톨릭파를 이용해 위그노파로부터 일신의 안전을 도모했다.”


비록 콜리니 제독 암살은 실패했지만 “평화 그 자체를 암살”하는 데에는 확실히 성공했습니다. 8월 23일 열린 국왕참사회는 콜리니 제독과 그의 수하들이 왕실의 안녕과 파리의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라 판단하여 이들을 모두 숙청하기로 결정합니다. 숙청은 은밀하게 계획되어 조직적으로 수행되었습니다. 23일 밤 파리 성문이 굳게 닫히고, 파리의 민병대가 모여 치안을 점검합니다. 성 바돌로매 축일인 8월 24일 새벽, 모두가 잠든 시간에 샤를 9세는 콜리니와 위그노 귀족의 숙청을 명령하고, 콜리니 제독을 비롯해 대다수의 위그노 귀족들이 살해당합니다. 앙리와 마르그리트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대부분의 위그노 지도자들이 파리에 있었지요.


한바탕 숙청이 끝난 뒤 생제르맹 룩세루아 교회의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종소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대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파리의 열혈 가톨릭 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위그노들을 학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대학살은 28일까지 파리 전역을 휩쓸었고, 파리를 벗어나 전국으로 퍼져나가며 10월 5일까지 프랑스 전역에서 수많은 위그노들이 학살됩니다. 이 학살로 인해 파리에서만 최소 3-4천명, 지방에서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살해됩니다.


<성 바돌로매 축일의 학살, 프랑수아 뒤부아, 1572>


성 바돌로매 축일의 학살이 프랑스 역사에 미친 영향을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1572년 대학살로 인해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견고히 보존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둘째, 왕의 명령에 의해 수많은 고위 귀족들이 숙청당한 이 일은 17세기 프랑스의 왕권신수설과 절대왕정으로 나아가는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베자, ⌜백성들에 대한 위정자의 권한⌟(1574)


고국 땅에서 들려오는 학살에 대한 소문은 제네바를 불안으로 몰아갔습니다. 로마 가톨릭 군대가 제네바를 공격하고, 베자도 암살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당시 베자가 불링거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베자의 심경을 볼 수 있는데요. “이것이 아마도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입니다. 이 학살은 일반적 공모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 아주 명백합니다. 암살자들은 나를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나는 삶보다는 죽음을 더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테오도르 베자>


대학살로 인해 수많은 피난민들이 제네바로 몰려왔습니다. 베자와 제네바 목사회는 위그노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들은 특별기도회를 열어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고, 각 지역의 시민들과 외국교회에게 프랑스 위그노 피난민들을 위한 모금을 부탁하였습니다. 제네바 시의회는 난민들을 물질적으로 돕고 제네바에 정착하여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베자는 설교를 통해 제네바로 피난 온 위그노들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네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습니다. 그는 두 가지 약속을 들려주었는데요. 첫째, 베자는 “십자가 아래를 벗어난 교회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소명을 주시고, 고난을 통해 그것을 이루신다고 하였습니다. 둘째, 베자는 창세기 22장,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를 통해 “주님께서 준비하셨습니다”라는 내용으로 설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의 후손 이삭을 위해 희생제물을 준비하신 것처럼,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해 주신다는 소망의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한편 성 바돌로매 축일의 대학살은 베자에게 얽혀 있는 실타래를 던져주었습니다. 이단자로 결정된 자가 일반 개인이 아닌 황제, 왕, 군주라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국가의 주요 관직을 담당하는 귀족이 이단의 논리대로 신민을 교육하고, 시민들로 그들의 거짓 가르침을 지지하는 의견을 갖게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프랑스에서 종교전쟁이 촉발되고, 위그노들이 이단으로 정죄되어 탄압을 받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인내하라고만 해야 한는가? 양심적 위그노들과 교회는 다른 나라로 피신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은 없는가? 수없이 던져지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개신교 지도자들은 답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에 위그노 학자들이 일련의 작품을 출판하게 됩니다. 베자도 ⌜백성들에 대한 위정자의 권한⌟(1574)이라는 책을 냅니다. 베자의 사상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명적이어서, 출판을 염려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베자가 제안한 저항 이론은 당시 유럽 각국에서 일어난 종교적 자유를 찾기 위한 저항의 근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대사회 형성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기에 역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베자는 로마서 13장 1-4절을 근거로 정치적 직책과 질서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생에서의 질서와 평화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 이런 직책과 질서를 주셨습니다. 이때 베자는 왕의 직임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 백성을 다스리는 최고위정자라는 직책은 백성들에 의해 선출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베자는 사울과 다윗의 예를 들었는데요. 사울과 다윗을 왕으로 택하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사울과 다윗은 사무엘과 이스라엘의 장로들의 임명을 받아 왕이 됩니다. 목자가 양무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양무리가 목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같이 “백성들은 위정자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위해서 위정자가 선출된 것입니다.”


베자는 고대 왕국의 역사를 살피며 왕과 백성의 정치적 언약관계를 입증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권력을 세우시지만, 권력자를 선출하는 것은 백성입니다. 정치적 언약관계를 따라 왕은 최고위정자로서, 백성은 국가 구성원으로서 의무와 맹세를 양심적으로 수행해야 하고, 백성은 왕이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는 조건에서만 왕에게 복종할 의무를 지닙니다. 따라서 위정자와의 약속이 깨질 때 저항이 가능합니다. “왕을 선출할 권리를 가진 자는 그를 폐위할 자격도 있다.”


하지만 위정자의 권력은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것이기에 아무나 함부로 저항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중요합니다. 베자는 판단의 척도로 십계명을 제시합니다. 베자에 의하면 십계명은 보통법, 곧 만민법입니다. 시대와 국가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모든 법은 십계명에 기초한다고 본 것입니다. 이는 로마서 2:14-15에 근거합니다. 비록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처럼 선명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마음에도 희미하게 하나님의 법을 새겨주셨는데, 그것을 자연법으로 본 것입니다. 따라서 베자는 이스라엘이 모세의 법을 통해 옳고 그름을 판단한 것처럼, 이방인들도 자연적 법을 양심에 비추어 윤리적 판단을 하는데, 타락한 이성은 그들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따라서 올바른 판단을 위해서는 성령에 의해 양심의 본래 기능이 회복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야 한다고 베자는 주장합니다. 올바른 법의 적용, 실천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가 되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베자는 저항의 주체가 최고위정자의 정치적 언약관계의 합법성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예컨대 불법으로 왕위를 차지한 경우 국가의 구성원 개인이 불법적 왕에게 저항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합법적 절차를 거쳐 선출된 왕이 폭군이 되었을 경우는 다릅니다. 이때는 최고위정자와 백성 사이에 존재하는 하급위정자가 저항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급위정자란 국가의 법이나 행정 등을 맡은 관료들을 말하는데요. 귀족, 시의원 등이 해당됩니다. 비록 그들은 왕의 명령을 듣고 임무를 수행하지만, 그들은 왕에게 종속된 자들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들은 무조건적으로 왕에게 충성하지 않고, 왕이 자신의 임무와 책임에서 벗어났을 때 조언과 경고를 할 수 있고, 필요한 경우 단호하게 진압하는 일은 합법적입니다.


베자는 최고위정자인 왕에 대항하여 합법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조건으로 세 가지를 언급합니다. 첫째, 왕의 명령이 국가의 공평과 보편적 법인 자연법에 기초한 정치적 체제에서 명백하게 어긋날 때 저항할 수 있습니다. 베자는 자연법의 기초를 십계명으로 봅니다. 즉 십계명을 기초로 왕의 명령을 판단해야 합니다. 둘째, 최고위정자에 대항하는 무력 저항은 최후의 수단입니다. 왕의 명령이 법에 어긋난다는 개인적 확신에 도달했을 때, 먼저 모든 수단을 통해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여기서 베자는 합법적인 정치제제로서 프랑스의 삼부회(성직자, 귀족, 평민 의원으로 구성된 프랑스의 신분제 회의)에 주목합니다. 하급위정자는 개인적 양심의 확신에서 저항을 시작할 것이 아니라 국가의 합법적 조직체의 논의와 합의를 통해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용이 없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무력 저항이 가능합니다.


성 바돌로매 축일의 학살 사건으로 4차 종교전쟁(1572-1573)이 발발하게 됩니다. 앙주 공 앙리(앙리 3세)가 군대를 이끌고 위그노의 거점 도시인 라로셸을 공격하였지만, 혹독한 겨울을 지나면서 양측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때마침 앙리가 폴란드 왕으로 선출되면서 전쟁은 멈추고, 라로셸은 제한적이나마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됩니다. 한편 성 바돌로매 축일 대학살 이후 샤를 9세는 우울증과 폐렴으로 고생하며 극도로 쇠약해져 갔고, 1574년 5월 30일, 2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샤를 9세를 이어 본래 앙주 공이었고, 폴란드의 왕으로 재위하던 앙리 3세가 프랑스의 왕이 됩니다. 앙리 3세는 카트린이 가장 총애하는 아들이기도 했는데요. 백성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지성적이고 세련된 궁정인이었지만, 사치와 향락, 동성애적 취향 등으로 비난과 미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칼에 맞은 흉터가 있는 사나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남성적인 앙리 드 기즈가 훨씬 더 유망한 가톨릭 지도자로 인정받았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국고는 이미 비어 있었고, 곤궁한 왕실은 앙리 드 기즈를 중심으로 조직된 가톨릭 동맹의 영향 아래 있을 수밖에 없었지요. 1584년 6월 10일, 앙리 3세의 유일한 동생인 앙주 공 프랑수아가 후손 없이 폐렴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앙리 3세에게는 자녀가 없었고, 자녀가 생길 가능성도 없었기에, 승계 순위에 따라 위그노 지도자 앙리 드 나바르가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프랑스의 최고 권력을 두고 세 앙리가 경쟁하게 됩니다. 역사가들은 ‘세 앙리의 전쟁’이라고 부르는데요. 이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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