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무엇인가
일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에게 “당신에게 일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제 생각에는 “돈을 벌어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어떤 것”이라는 답변이 가장 많을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진실입니다.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 또 인간으로서 필요한 것들을 누리기 위해, 일을 해서 돈을 법니다. 하지만 일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일이 단순히 돈만 벌기 위한 것이라면, 충분히 많은 돈이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일하는 이유, 그리고 충분히 돈이 많아서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기력하고 공허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맞습니다. 일은 벌어 먹고 살기 위한 것이 전부가 아니지요. 일은 자아 실현, 자아 성취를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일을 통해 성취감과 보람을 느끼고, 그것은 우리의 삶에 활력을 줍니다. 이런 성취감은 일의 중요한 요소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 또한 일의 전부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야망에 사로 잡힌 사람의 자아 실현은 종종 도덕적 의미를 배제한 채 더 많은 부, 더 큰 영향력, 더 높은 명예, 더 강한 힘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일을 이용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일은 일종의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일의 끝에는 자아 실현과 성취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공허함과 허망함입니다.
그렇다면 일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일을 일종의 저주처럼 생각합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도록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저주를 받아서 일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창세기 3장 17절에서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에게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좀 더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일은 죄의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일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계획하신 일은 무엇일까요?
1. 사람은 일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창조하신 세상을 다스리게 하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는 사람에게 다스리는 ‘일’을 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27-28절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면서 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은 복입니다. 고대 근동의 창조 신화들을 보면, 신이 인간을 만든 이유가 고된 노동을 시키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신이 편하게 쉬려고 인간에게 노동을 시킵니다. 여기에는 노동이 처음부터 인간에게 필수적으로 주어졌지만, 악하고 천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가 일을 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복이라고 말합니다.
일이 복인 이유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창조를 하나님이 6일 동안 규칙적으로 일하신 것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일하셨고 그 일에서 큰 기쁨을 누리셨습니다(창 1:31).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여 지극히 선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장 2절은 이 창조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후에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계속됩니다. 2장 7절에서 하나님은 장인이 도자기를 빚듯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십니다. 8절에서 하나님은 에덴에 동산을 만드시고, 나무가 나게 하시고, 강을 내십니다. 2장에서 하나님은 동산을 아름답게 가꾸는 동산지기로 묘사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도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은 하나님처럼 일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창세기 2장 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것을 ‘다스리고 지키게’ 하십니다. ‘다스리다’라고 번역된 말은 본래 ‘일하다, 섬기다’라는 뜻입니다. ‘지키다’는 말은 ‘보살핀다’는 의미입니다. 동산을 섬기고 보살피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리게 하시려고 사람을 창조하셨는데(창 1장), 하나님이 아담에게 실제로 하게 하신 일은 “섬기고 보살피는” 일입니다(창 2장). 우리는 다스린다는 말을 들으면 보통 높은 자리에 앉아서 지배하고 강압하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창세기는 ‘다스린다’는 말의 본래 의미가 ‘섬기고 보살핀다’는 뜻이라고 말해줍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통치하신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고 섬기신다는 의미입니다.
2. 일은 ‘섬김’이다
하나님은 섬김을 받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충만하고 풍성한 생명과 능력으로 하나님은 세상을 돌보시고 섬기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다스림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셔서 다스리게 하자고 하신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섬김에 동참하게 하려고 우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이 세사을 섬기시는 것처럼 세상을 섬기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일의 본질이고, 우리가 일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우리가 하는 매일의 일은 그 일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을 닮은 섬김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완성된 문명의 세상으로 창조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경작해야 할 땅을 주시면서 사람이 의지를 내고, 지혜를 발휘하고, 서로 협력하여 문명을 발전시켜 나가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정복하라”는 명령의 의미입니다. 사람이 문명을 이루어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힘을 주시고, 협력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루터는 하나님이 사람의 일(직업)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이 모든 일을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을 통해 세상을 섬기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면, 이 말이 좀 더 쉽게 이해됩니다. 오늘날 세밀하게 분업화된 이 모든 일을 나 혼자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일을 멈춘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은 야생이 될 것입니다. 문명과 야생의 차이는 ‘일’에서 나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문명은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일하기 때문에 누리는 것입니다. 일이 없다면 우리가 지금 누리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깨끗한 길로 다닐 수 있는 것은 누군가 쓰레기를 치우고 청소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 입는 옷, 우리의 손에 있는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누릴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의 본질은 섬김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하도록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서로를 섬기도록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일이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해도, 우리는 바로 그 일을 통해 오늘도 누군가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3. 일은 그 자체로 존엄하다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이고, 사람은 하나님을 닮아서 일을 한다면, 일은 그 자체로 존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개념이 나왔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런 생각은 성경 외에 다른 사상과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의 현실은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머리로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의 마음은 귀한 직업과 천한 직업이 따로 있지요. 예컨대 한겨울 새벽길을 돌아다니며 대리운전을 하거나, 공장 생산라인에서 단순한 일을 끝없이 반복하는 일이 적성이라고 생각하거나, 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사회적으로 인정과 존경을 받고, 경제적인 보상이 많은 일은 귀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요. 즉 우리는 많은 사람이 하고 싶어하지만 하지 못하는 귀한 일이 있고, 누구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천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 유명한 수학 강사가 유튜브에서 용접하는 흉내를 내면서 ‘수능 7등급 나오면 용접 배워서 호주 가야해, 돈 많이 줘’라고 말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많은 비난이 있었고, 그 강사는 해당 동영상을 내리고 사과 방송을 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현상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 그렇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난합니다. 비록 현실은 이렇지만, 직업에 귀천이 없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말할까요? 성경은 그야말로 모든 일이 존엄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일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하나님을 닮아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위나 급여와 상관없이 일은 존엄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이런 것들로 일의 귀천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완성시켜가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하고, 거기서 만족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4. 일은 하나님을 닮아 가는 수단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도 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일은 실제로 하나님의 일을 닮아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먼저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2절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했다고 말하지요. 이 땅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물질계를 만드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물질계는 혼돈하고 공허했습니다. ‘혼돈하고 공허하다’는 말의 의미는 ‘모양이 없고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없는 중에 물질을 만드셨는데, 아직 모양도 없고 비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그 위에 일하고 계셨습니다.
3절 이후의 창조 사역은 주로 모양을 만들고 빈 곳을 채우시는 일입니다.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는 모양을 만드시고, 만들어진 공간을 재배치하는 일을 하십니다. 빛을 창조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누십니다. 궁창을 만드시고 궁창 위와 아래로 물을 나누십니다. 물과 땅을 구분하시고 땅에는 식물이 자라게 하십니다.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비어있는 공간을 채우십니다. 우주를 해와 달과 별들로, 물과 하늘과 땅에는 각종 동물로 채우십니다. 결국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모양을 내고 채우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에서 물질을 만드신 것은 한 절로 간단하게 설명하고, 6일 동안 모양을 내시고 채우신 일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에서 어떤 것을 창조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이후에 일들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일과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셨는지 가르쳐 주셔서, 우리의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도 기본적으로 모양을 내고 채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원재료를 가지고 이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팀 켈러는 말합니다. “이러한 패턴은 일의 종류와 상관없이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다. 농업은 흙과 씨앗이라는 물질적인 재료를 가지고 먹을거리를 만들어 낸다. 음악은 음이라는 물질적 소재를 가져다가 아름답고 신나게 재배치해서 삶을 풍요롭게 한다. 옷감을 가져다 의복을 만들고, 빗자루를 들고 방을 치우고, 기술을 동원해서 전기의 힘을 제어하고, 말랑말랑하고 깨끗한 마음에 무언가를 가르치고, 어느 부부에게 뒤엉킨 관계의 매듭을 푸는 비결을 알려 주고, 단순한 재료를 사용해서 가슴에 사무치는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는 그 하나하나가 곧 빚고 충만하게 하고 정복하는 하나님의 사역을 계속 이어 나가는 작업이다. 혼돈을 정리해서 질서를 잡고, 창조적인 잠재력을 끌어내며,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서 창조 세계를 펼쳐 보일 때마다 하나님의 창의적인 문화 개발 패턴을 따르고 있다고 보면 된다.”
조금 더 설명을 드리지요. 농업의 경우, 농부는 밭에 씨를 뿌리고 물을 댑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을 이렇게 재배치한 결과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가 맺힙니다. 농부는 열매를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재배치하고 채웠을 뿐입니다. 음악은 소리를 재배치하여 아름다운 소리로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모양이 없던 것을 재배치하여 모양을 내고, 비어 있는 것을 채웠습니다. 청소는 필요 없고 더러운 것을 쓰레기통으로 재배치하여 필요한 공간을 깨끗하게 합니다. 교사는 학생들의 비어 있는 머리와 마음에 지식을 채우고 재배치합니다. 상담가는 사람의 뒤엉킨 마음과 관계를 재배치하도록 돕습니다. 저는 어떨까요? 목사는 설교를 하기 위해 원고를 씁니다. 먼저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정리합니다. 구조와 형식을 고민하고, 단어를 고르고,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기 위해 고민합니다.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글을 재배치합니다. 재배치하여 모양을 내고, 글로 내용을 채웁니다.
이 세상의 어떤 일이든지 그것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과 닮은 것이라면, 일은 정말로 존엄한 것이고, 일하는 사람을 존엄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원래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하시는지 창세기 1장을 샘플로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닮은 모든 일은 창조적이고 존엄합니다.
5. 일은 ‘소명’이다
중세 시대에는 교회의 일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기 때문에 거룩하고 귀한 일이고, 그 외에 다른 일은 일반적이고 세속적인 일로서 천박하지만 불가피하게 해야 할 일로 보았습니다. 이런 생각을 바꾼 것이 종교개혁자들이었습니다. 특별히 루터는 교회와 세속사회의 일의 구분을 완전히 없앴습니다. 루터의 말을 들어봅시다. “교황, 주교, 신부, 수도사들을 ‘신령한 직분’으로 칭하면서 왕족, 귀족, 장인, 농부들은 ‘세속의 직분’이라고 부르는 건 모두 지어낸 소리다. 철저한 기만이요 위선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누구도 거기에 주눅들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진정으로 신령한 직분을 가졌으며 직무의 종류가 다르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루터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너나없이 동등하게 일로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루터는 직업을 소명(부르심)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일로 부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세상을 섬기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일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섬김에 동참하게 됩니다. 루터의 말을 더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좇기 위해 우리가 하는(밭에서, 정원에서, 시내에서, 집에서, 전쟁터에서, 정부에서, 아니면 다른 어느 곳에선가) 일은 하나같이 어린아이가 하는 짓 같아서 밭에서, 집에서, 그밖에 어디서든 선물을 주고 싶어 하시는 주님이 친히 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하자면 그 모두가 하나님의 가면인 셈이어서 주님은 뒤에 숨은 채로 사실상 모든 일을 다 하신다.”
하나님은 직접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필요를 채워주실 수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서툰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물을 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저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성실하고 책임있는 존재로 성숙하길 원하셨고, 하나님이 일을 통해 그러셨던 것처럼 기쁨과 성취를 느끼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일을 통해 선물을 주실 뿐만 아니라 일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6. 행복하고 싶다면 하나님처럼 일하고 하나님처럼 쉬라
사람은 처음부터 일을 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일거리가 없으면 적잖이 불안해집니다. 보통 생존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에 따르면 생존을 위해서는 일해서 버는 돈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일 자체가 필수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며 삶에 목적을 주는 주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러한 일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스스로 일하신 뒤에 쉬셨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창 2:2). 하나님은 굳이 쉼이 필요하지 않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7일 중 하루를 쉬셔서, 우리에게 쉼이 필요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일은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하지만, 일만이 유일한 삶의 의미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일을 삶의 목적으로 삼게 되면 그것이 설령 교회를 섬기는 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과 대적하는 우상을 만들어내는 셈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삶의 으뜸가는 토대일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요소들(일, 가족, 여가, 우정, 행복 등)을 진정 가치있게 하면서 중독과 왜곡에 이르지 않도록 막아 주는 예방약입니다.
너무 빤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 진리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특별히 오늘날 더욱 중요합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일은 고단하고 불만스럽기만 한 탓에 피하거나 참고 견뎌야 할 짐으로 결론 내리기 쉽습니다. 반대로 늘 불안하고 확신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은 일에서 확신과 안정을 찾고자 하여, 출세와 성공에 모든 것을 쏟아 붓기 쉽습니다. 두 가지 태도 모두 일을 더욱 무의미하게 만들고 만족스럽지 못하게 만듭니다.
인간은 일하도록 지음받았고, 일을 통해 기쁨과 자유를 누립니다. 하지만 삶이 통째로 일에 빨려들어가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우리는 일의 한계를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과 쉼의 균형을 잡는 신학적인 기초를 견고하게 다지는 작업이야말로 의미 있는 일을 시작하기 위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출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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