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항
성도들의 이러한 견인은 그들 자신의 자유 의지에 의존하지 않고, 아버지 하나님의 값없고 변치 않는 사랑에서 나오는 선택 작정의 불변성과(딤후 2:18,19; 렘 31:3; 엡 1:4,5; 요 13:1; 롬 8:35-39),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재 사역의 효력과(히 19;12-15, 10:10,14, 13:20,21; 롬 8:33-39; 요 17:11,24; 눅 22:32; 히 7:25), 성령의 내주하심과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씨와(요 14:16,17; 요일 2:27, 3:9), 은혜 언약의 본질(본성)에 의존한다(렘 32:40; 히 8:10,11). 이 모든 것들로부터 견인의 확실성과 무오성이 나온다(요 10:28; 살후 3:3; 요일 2:19; 살전 5:23,24; 히 6:17-20).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3-24)
성도의 견인은 실패할 수 없는 확실성의 근거(이유)를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로 된 일련(series)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7장 2항은 그 근거를 일곱 가지로 말합니다. 성부 하나님의 불변의 사랑, 하나님의 선택 작정의 불변성,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그의 중재(중보) 사역의 효력, 성령의 내주하심, 성도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씨, 하나님의 은혜 언약의 본질에 성도의 견인이 의존하며 근거합니다. 이 모든 것들에 근거(의존)되어 있는 성도의 견인은 실패할 수 없으며(무오하며) 확실합니다. 성도의 견인의 실패할 수 없는 확실성의 근거로 제시한 일곱 가지를 하나하나 그 근거의 신학적 의미(성경적 의미)를 정밀하고 정확하고 풍부하게 이해하고 적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도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씨”(요일 3:9)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르게 이해해야만, 성도의 견인의 확실한 근거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주석자들은 이 “하나님의 씨”를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합니다. 거의 모든 주석가들이 동의하는 것은 이 “하나님의 씨”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때 중생된 우리 안에 행하신 것(이루신 것)과 중생된 우리에게 계속적으로(성령과 말씀으로) 행하시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미 행하셔서 중생된 자 안에 영구히 이루어지게 하신 것과, 계속 되는 성령의 사역으로 인해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거듭난 자가 완전하다는 의미도 아니며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사도 요한이 여기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요한일서 5장 16절에서 말하고 있는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일 것입니다. 사망에 이르는 것은 죄 사함을 받지 못하고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8장 29-30절을 보면, 택하심을 받고, 부르심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영원한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고 다 영화롭게 될 것을 확언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과거 시제를 사용한 것은 궁극적 구원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엡 2:5-6 참조).
성도(참 신자)의 견인(참고 견디면서 끝까지 믿음으로 인내하는 것) 교리는 우리에게 큰 위로를 주는 성경의 명확한 계시 진리입니다. 우리는 이 견인 교리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께서 끝까지 우리를 붙드신다는 것과 우리는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우리의 육안으로 대면하여 볼 수 없기 때문에,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 말씀을 수용하여 믿어야 할 것은 믿고 순종해야 할 것은 행해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삶 전반에 걸쳐 믿음으로 끝까지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은 자기 자신이나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어떤 것에 대한 모든 의존을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만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형편을 만나든지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붙잡고 소망하며,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의 율법에 부합한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일을 행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진정한 믿음으로 행하면, 비록 우리 자신과 우리의 행위가 완전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행위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나, 믿음으로 행할 것을 기꺼이 받으시고 그것에 대해 보상하시는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성도가 인내하는 것과 인내하는 성도를 끝까지 보존해 주시는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지만, 성도가 견인해야 하는 것은 신자의 의무입니다.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동시에 신자의 임무입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유일한 구원자요 주님께 끝까지 신실하되 죽기까지 충성하라고 권고합니다(마 24:13; 요 15:1-10; 롬 2:7-8; 골 1:23; 히 2:1, 3:14, 6:11; 요일 2:6,24,27, 3:6,24, 4:12절 이하; 계 2:10,26).
성경은 때때로 배교의 가능성이 실재하는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신실하지 못함에 대해 엄중한 형벌로 위협합니다(겔 18:24; 마 13:20-21; 요 15:2; 롬 11:20,22; 딤후 2:12; 히 4:1, 6:4-8, 10:26-31; 벧후 2:18-22). 그리스도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 영적 침체 또는 퇴보(backsliding)를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대개는 나는 잠시 침체하게 된 것이지 믿음에서 떠나 배교(apostasy, 변절)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일시적 침체나 배교는 처음 시작 단계에서는 분간하게 어렵습니다. 배교에 이르지 않도록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는다면 일시적 퇴보가 배교로 연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주의하고 깨어 있으면서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개혁파 교회의 성도의 견인 교리는 진정한 구원의 신앙을 가진 자는 끝까지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머물러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견인 교리는 신자들이 자기 의지와 힘으로 자기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시작하신 구원의 은혜의 사역을 계속하시고 완성하시려고 믿음을 지탱해 주신다는 것입니다(빌 1:6; 벧후 1:10-11; 요 10:28-29; 롬 8:24-39; 벧전 1:5).
개혁파 교회의 성도의 견인 교리는 끝까지 참고 견디는 신자의 행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 사역이 반드시 지속되고 완성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인내를 통해 이 일을 이루십니다. 성도의 인내는 진정한 의미에서 신자의 인내가 아니고 신자들에 대해 그리고 신자들에게 끝까지 은혜의 사역을 지속하면서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인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힘이 없는 나 자신이 하나님을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불변의 사랑과 전능의 손으로 연약한 나를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찬송가 421장(나는 갈 길 모르니), 422장(나그네와 같은 내가), 423장(나의 믿음 약할 때), 424장(나의 생명 되신 주), 460장(지금까지 지내 온 것)은 바로 이것을 고백하고 감사하며 찬송하는 것입니다.
*본 글은 송용조 목사님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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