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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병철 안

제18장 은혜와 구원의 확신(3)

3항

이 실패하지 않는다는 확신은 믿음의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참된 신자라도 확신을 가지기까지 오래 기다리며, 많은 어려움을 인해 갈등을 겪을 수도 있다(요일 5:13; 사 50:10; 막 9:24; 시 88:1-18, 77:1-12).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성령께서 알게 하심으로, 그는 비범한 계시가 없이도 통상적 방도들을 바르게 사용함으로 확신에 도달할 수 있다(고전 2:12; 요일 4:13; 히 6:11,12; 엡 3:17-19; 시 77:10-20).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자기의 부르심과 선택을 확신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벧후 1:10; 롬 6:1,2). 이로써 그의 마음은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로 가득 차게 되며, 순종의 의무에 대한 힘과 즐거움이 증대된다. 이와 같은 것들은 확신의 적합한 열매들이다(롬 5:1,2,5, 14:17, 15:13; 엡 1:3,4; 시 4:6,7, 119:32). 이 확신은 사람을 해이하게 하는 것과는 거리가 매우 멀다(요일 2:1-2; 롬 4:1,2; 딛 2:11,12, 14; 고후 7:1; 롬 8:1,12; 요일 3:2,3; 시 130:4; 요일 1:6,7).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사 50:10)

 

‘신앙과 확신’의 관련성을 설명함에 있어서 확신이 구원 얻는 믿음의 본질에 속한 것인가, 아니면 확신은 신앙의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닌가에 관한 신학자들의 견해는 일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다른 전통들(예를 들자면 로마 가톨릭 교회, 개신교 가운데 아르미니우스 주의자들 등)의 견해는 그만 두고라도 종교개혁 전통에 속한 자들의 표현에도 다소간 차이가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들(루터, 멜랑히톤, 칼빈, 우르시우스 등)은 구원의 확신을 구원 얻는 신앙의 본질(구원 얻는 믿음의 중요한 성분, 즉 요소)로 말했습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자기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되었다고 하는 신자의 확신적 신뢰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믿음을 정의했다고 해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여러 가지 의심과 확신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갈등할 수 있음을 부인하려 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에게 구원 얻는 믿음이 있다면, 그 신앙의 작용에 신뢰(확신)가 포함된다는 의미로 말한 것입니다.


개혁파 신학자들 가운데 확신이 신앙의 본질에 속한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신뢰(확신)를 포함한다는 견해를 가진 신학자들은 스위스의 말란(Malan), 스코틀랜드의 매로우멘(Marrowmen)들, 화란 개혁 교회의 카이퍼, 바빙크, 보스, 벌코프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1문에서 말하는 ‘참된 믿음’의 정의에 동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가하면 다른 한 편에서는 확신은 신앙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성숙한 과실로 보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투레틴, 찰스 하지, A. A. 하지, 데브리 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8장 3항은 “확신은 믿음의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참된 신자라도 확신을 가지기까지 오래 기다리며, 많은 어려움을 인해 갈등을 겪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확신은 구원 얻는 믿음이 주어졌다고 해서 아무런 어려움이나 노력도 없이 자동적으로 가지고 누릴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라도 확신을 가지기까지 오래 기다리며 많은 어려움을 인한 갈등도 경험하게 되고, 확신에 이르기 위해 주어진 은혜의 방도를 부지런히 사용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개혁파 신학자들 가운데 확신을 신앙의 본질로 말한 자들도 있고, 확신을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 신앙의 과실로 본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견해와 주장이 전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칼빈을 위시하여 개혁파 신학자들의 저서들을 통해 그들의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게 되면, 확신에 관한 그들의 견해가 크게 차이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칼빈의 믿음의 정의(기독교 강요, 제3권 2장 7항, 27쪽)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8장 3항의 진술이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칼빈이 믿음을 정의한 기독교 강요의 다른 곳들을 읽어보면, 확신에 관한 이들의 주장이 크게 차이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믿음의 행위를 “은혜 언약 덕분으로, 칭의와 성화와 영생을 위해 그리스도만을 영접하고 받아들이며 신뢰하는 것이다”(14장 2항)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이 세 가지 요소(그리스도만을 받아들이고 영접하고 의지하는 것)는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8장 3항은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직접적인 행위와 구분하여 구원의 확신은 ‘반사 행위’로 말한 것입니다. 직접적인 믿음의 행위를 “그리스도는 구원하실 능력이 있다”라고 말하는 반면, 믿음의 반사 행위로는 “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직접적인 행위’와 이 믿음의 ‘반사 행위’(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를 겨냥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신을 겨냥한)의 차이를 구분하여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 글은 송용조 목사님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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