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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병철 안

제97문 성찬을 합당하게 받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지난 시간에 우리는 성찬에 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성찬에서 사용되는 외적 요소는 떡과 포도주입니다. 성찬식은 주님께서 보이신 모범을 따라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기도한 후, 그것을 떼어 나누어주는 순서를 따라 진행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요소들과 행위들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그분의 모든 은혜에 참여함을 나타낸다고 하였습니다. 이 성찬에 믿음으로 참여하는 자는 은혜 가운데서 자라고 헌신이 새롭게 되며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교제를 더욱 공고이하는 은혜를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소요리문답 97문을 중심으로 성찬에 참여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97문: 성찬을 합당하게 받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답: 성찬에 참여하려는 자는 자신에게 주님의 몸을 분변하는 지식이 있는지, 주님을 양식으로 삼는 믿음이 있는지, 회개와 사랑과 새로운 순종이 있는지 스스로를 살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합당치 않게 나아와 자신에게 임할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 됩니다.

성찬을 합당하게 받기 위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찬이 우리에게 효력 있는 구원의 방도가 되는 것은 성례의 요소인 떡과 포도주나 성례 행위 그 자체에 신비한 효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 교회의 성찬이 차이를 갖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가 축성의식을 통해 실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고 가르칩니다(화체설). 따라서 그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떡과 포도주, 그리고 성례 행위들이 나타나는 복음에 대한 지식이나 믿음이 없어도 성찬식을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소요리문답 91문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찬이 효력 있는 구원의 방도가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 주심과 성례를 믿음으로 받는 자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일하심으로 되는 것”입니다(영적임재설).

그리고 이 사실은 성령의 역사하심과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 편에서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설교의 강설이 우리 구원을 위해 효력 있는 구원의 방도가 되는 것도 성령께서 설교를 효력있는 방도로 사용하시어 듣는 이들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설교라는 도구를 통해 우리 마음을 설득하시고 회개케 하시며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하십니다. 동시에 우리는 부지런함과 준비와 기도로 설교를 듣는 자리에 나아가야 하며, 믿음과 사랑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찬에 합당하게 참여하여 영적 은혜를 공급받기 위해서 준비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8-29절을 읽어봅시다.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28절에서 사도 바울은 사람이 자기를 살펴야 한며, 그런 다음에 떡을 먹고 잔을 마셔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살피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도키마조’(dokima,zw)입니다. 이것은 검사하고 주의 깊게 살펴보고 확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금이나 은같은 귀금속의 품질을 판단하기 위해 시금석을 사용합니다. 마찬가지로 성찬에 참여하는 자 역시 자기 자신을 시험하고 점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소요리문답은 “성찬에 참여하려는 자는 자신에게 주님의 몸을 분변하는 지식이 있는지” 스스로 살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29절에서도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즉, 성찬에 나아갈 때 우리는 우리에게 주의 몸을 “분변”하는 지식이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변”이라는 것은 ‘구별하다’, ‘식별하다’, 또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다른 사람과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하고 분리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몸을 분변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찬의 떡과 포도주, 성찬의 행위들이 드러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의 의미와 가치를 바로 알고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이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가리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집에서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듯이 그렇게 성찬의 상에 참여하는 사람은 주님의 몸을 분변하는 지식이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는 성찬이 나타내는 그리스도를 그저 역사 가운데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우리가 위인을 기리는 정도로 예수님을 평가하고 성찬에 참여하는 것도 주님의 몸을 분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그분의 죽으심은 죄인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음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찬의 상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에게 “주님을 양식으로 삼는 믿음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주님을 양식으로 삼는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나타내는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을 믿으며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적 생명을 풍성히 누리며 사는 믿음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이 말씀은 예수님이 사실은 사람이 아니라 떡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비유로 자신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양식(떡)을 먹고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양식으로 삼는 믿음”이 있는지를 살핀다는 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이 우리에게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고백할 뿐 아니라 예수님과의 교제 속에서 생명의 능력을 계속해서 공급 받으며 살아가는 믿음의 작용이 있는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회개와 사랑과 새로운 순종”이 있는지를 스스로 살펴야 합니다. 회개와 사랑, 새로운 순종은 앞에서 살펴본 “믿음”의 열매들입니다. 예수님을 양식으로 삼는 참된 믿음이 우리 일평생 지속되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회개도 지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회개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떼어낼 수 없는 한 쌍의 은혜입니다. 의로우신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임 당하셨음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신의 죄를 슬퍼하며 미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 교회 안에는 이러한 회개 없이 무분별하게 성찬에 참여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고전 11:17-34 참조). 부유한 성도들이 가난하고 비천한 신분의 성도들이 성찬상에 나오기도 전에 자신들끼리 성만찬 모임을 가졌고, 일을 마치고 뒤늦게 참여한 가난한 성도들을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거룩한 예식인 성찬을 자신들의 부와 지위를 자랑하고 가난한 자와 자신들을 구별하는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양식으로 삼는 믿음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도, 죄 없으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살 찢기신 가장 큰 이유도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따라서 성찬의 상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마련된 식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식탁에 나아오는 자에게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내어주심으로 차리신 사랑의 상으로 나아가는 우리도 주님께 대한 사랑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또 함께 그 상에 참여하게 된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끝으로 “새로운 순종”이 있는지 스스로를 살펴야 합니다. 여기서 새로운 순종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우리 삶을 개선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순종은 믿음과 회개를 통해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시고 용서하신 주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감사로부터 우러나오는 순종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님을 양식으로 삼는 참된 믿음이 있으며, 회개와 사랑이 있다면 우리는 미지근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의 형식을 지킨 것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는 데까지 거슬러 올라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순종을 다 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상에 나아가는 가는 자는 이와 같은 “새로운 순종”이 자신에게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이와 같은 자기 살핌을 게을리 한다면 그것은 “합당치 않게 나아와 자신에게 임할 심을 먹고 마시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조심함과 두려움 없이, 성찬상에 나아왔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친히 다루셨습니다.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몸이 약해지거나 병에 걸렸고 심지어 죽음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30절).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의 거룩한 만찬에 합당치 않게 참여하는 자들로 인해 자신의 상이 더러워지는 것을 미워하십니다. 그러므로 주의 상에 참여하기 전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잘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1장 31-32절을 읽어봅시다.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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