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질병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이해
하나님이 세상을 처음 창조하셨을 때 세상은 선하고 온전했습니다(창 1:1). 당연히 사람은 온전하고 건강했으며, 질병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범죄한 후, 세상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저주 중 하나가 다양한 형태의 질병입니다. 그런 점에서 세상에 질병이 존재하게 된 것은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질병이 죄의 결과일뿐만 아니라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한 형벌로 하나님께서 질병을 주실 때도 있다고 말해줍니다. 모세를 비방한 미리암에게 하나님은 악성 피부병에 걸리게 하셨습니다(민 12:8-10).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탈취했을 때, 블레셋 성읍에 전염병을 내리기도 하셨지요(삼상 5장). 고린도교회가 성찬을 합당하지 않게 행하였을 때, 그들의 죄에 대한 징계로 약한 자, 병든 자, 잠자는 자가 많았다고 했습니다(고전 11:29-32).
그렇다면 우리가 겪는 모든 질병은 죄의 결과요 하나님의 심판인 것일까요? 어떤 분들은 위의 사실에 근거하여 ‘질병 = 죄의 결과’ 또는 ‘질병 =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공식으로 모든 상황에 기계적으로 적용하곤 합니다. 이런 예를 성경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길을 걸어가실 때, 태어날 때부터 시작장애를 가진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 사람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인가요? 자기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3). 제자들은 ‘장애 =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시며 이 사람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이유는 누구의 특정한 죄 때문이 아니라, 그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질병(전염병)을 단순히 죄의 결과,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기계적으로 적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단순히 질병을 죄에 대한 심판의 도구로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선하게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셨던 욥의 경우 그의 환난과 질병은 그를 더욱 연단하시고 성숙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서 의인과 선인도 환난을 겪고 질병에 걸린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반대로 악인이 형통하고 무병장수하기도 합니다. 시편 73편에서 시인은 그 모습에 낙심할 뻔 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질병과 고난, 죽음에 대해 어떤 한 가지 시각만을 가지고 기계적으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병에 대해서, 혹은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와 같은 대전염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까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겸손히 물으며 주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며, 이것이 죄에 대한 징계인지, 나를 성숙하게 하시려고 주신 시련인지 주님께 겸손히 물으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이런 질병에서 치료해주시길 간절히 기도하며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는 중에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질병을 계속 지니고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면(고후 12:7-10, 바울의 경우),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이미 충분한 줄 인정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 더 잘 드러나기를 소망하며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앙을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질병과 약함만 주시지 않고, 더 큰 위로도 주십니다. 그리하여 나와 같은 연약함을 가진 성도들을 위로하는 일을 감당하게 하십니다(고후 1:4). 궁극적으로 우리는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는 더이상 이런 질병과 죽음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믿는 사람으로서, 그 나라가 속히 임하도록 소망 가운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의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믿음을 굳게 하시고, 위로와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은혜 주시기를 구합니다.
2. 중세 흑사병에 대한 이해
14세기 중엽에 유럽 인구의 30%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흑사병은 18세기 초까지 산발적으로 창궐하며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아 갔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병의 이름도 모른채 그저 ‘대역병’ 혹은 ‘유행병’이라 부르는 두려운 재앙 속에서 무력하게 죽어갔습니다. 이 병이 처음 발병된 곳은 서양이 아닌 동양이었습니다. 그 전염 경로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비단길을 통한 유럽과 중국의 무역을 통해서 전파되었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는 제노바 상인들의 상선을 통해 전염되었다는 것인데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몽골군이 크림반도의 페오도시아라는 도시를 포위하고 공격하던 중 군대에 전염병이 돌고 많은 사망자가 발생합니다. 퇴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몽골군은 투석기에 전염병으로 감염된 시체를 넣어 성 안으로 던져 넣었습니다. 이 일로 도시에 전염병이 창궐하게 되고, 그곳에 있던 제노바의 상인들이 급히 이탈리아로 도망갑니다. 기록에 의하면 1347년에 콘트탄티노플부터 시작해서 카이로, 시실리아의 메시나 지역에 흑사병이 발발했는데요, 가장 치명적인 접촉이 제노바 상인들이 메시나 항구에 들어올 때 일어났습니다. 이미 흑사병으로 죽은 선원들의 시체들이 실린채로 배가 들어오면서 질병은 빠르게 온 유럽으로 전파되었습니다.
흑사병이 창궐하자 유럽의 모든 도시는 극도의 혼란에 빠집니다.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예방할 수 없었고, 증상이 드러나 감염된 사실을 알아도 치료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은 감염자를 격리하거나 감염자로부터 도망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이 지오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라는 책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당시 도시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시체가 널부러져 있었고, 시체를 실을 들것이 모자라서 시체를 방치하거나 들것 하나에 여러 명의 시체가 실려 있었다고 합니다. 들것 하나에 형제, 부부, 부모와 자식의 시체가 같이 실렸고, 자고 일어나서 아침이 되면 다시 끝없이 많은 시체가 널부러져 있었습니다. 부자는 재물을 버리고 안전한 곳으로 도망쳤고, 부모는 자식을, 자식은 병든 부모를 버리고 도망쳤으며, 가축들은 돌보는 사람 없이 떠돌아 다녔다고 합니다.
흑사병이란 대재난의 상황을 잘 대처하지 못한 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교회와 사람들은 이 전염병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현실을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누가 피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6세가 1350년을 ‘대사면’을 받을 수 있는 ‘성년’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대사면’이란, 완전한 죄 사함을 말하지요. 교황이 선포한 ‘성년’에 고해성사를 받거나 로마의 성베드로와 성바오로 성당을 순례하여 참배한 자들은 모든 죄를 사함받아 연옥을 거치지 않고 바로 낙원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죽더라도 사죄의 은총을 받아 지옥과 연옥에만 가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순례길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성년의 해에 백만 명이 넘는 인파가 로마로 순례길에 올랐다고 하는데요, 이들은 치료를 위해서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사면을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필립 지글러라는 역사가는 “역병이 확산되는데 있어서 이런 종교적 신념보다 더 적절한 환경을 조성해 준 것은 없다.”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이런 인식의 또다른 결과는 ‘자의적 보상 행위’와 ‘채찍질 고행단’, ‘민간신앙’의 출연이었습니다. 죽기 전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교회에 바침으로 보상과 위안을 얻고자 했고, 자신의 몸을 자해하는 고행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려고 했습니다. 스트라스부르그의 연대기록자인 프릿췌 클로제너의 보고에 의하면 1349년 200명의 채찍질 고행단이 스트라스부르그에 도착하였는데, 그들의 의식 중에 교회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과 자신들을 세 차례에 걸쳐 바닥에 던져 십자가의 형태를 만드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루에 두 번씩 그들은 스스로를 채찍질 했고, 종이 울리면 속옷만 입은 채로 원을 만들어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죄를 고백한 후 영적인 노래를 부르거나 채찍질을 계속했습니다. 그들의 행렬과 그들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로 인해 전염병은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이 당시 더욱 유행한 것이 행운의 부적과 질병을 막아줄 수호성인들을 찾아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14명의 수호성인이 유명했는데요, 인생의 위협이 되는 질병과 위험을 14개로 분류하고, 각 상황에 해당하는 수호성인을 정합니다. 그리고 그 상황이 되면 그에 해당하는 수호성인에게 기도하고 거기서 위로를 얻고자 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죽음의 공포엔 아카티우스, 광부들이 갱도에 들어갈 땐 바바라, 목에 통증이 있을 땐 블라시우스, 두통 치통엔 디오니시우스, 사냥할 땐 유스타키우스, 몸에서 열날 땐 게오르그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죄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해결책을 사람의 공로와 보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신앙의 결과가 대전염병의 상황에서 이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결국 교회와 통지자들의 권위는 크게 떨어집니다. 보카치오의 묘사에 따르면, “종교적, 그리고 세속적 법에 대한 존중이 거의 파괴됐는데 이는 그 법을 집행하는 이들이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전부 아프거나 죽어 있었고 살아있다 하더라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도 전염병에 대한 나름의 방역 시스템을 갖추고 대응한 곳도 있었습니다. 베네치아의 경우 동쪽에서 온 선박은 흑사병 환자가 없더라도 잠복기간을 고려해 40일이 지난 후에 입항을 허락했고, 시내 곳곳에 35개의 병원과 진료소를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쥐를 통해서도 감염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큰 효과는 없었다고 합니다. 가장 잘 대처한 곳은 밀라노였습니다. 가까이 있었던 피렌체에서는 80%의 시민이 사망했을 때, 밀라노는 15%의 사망자만 발생했다고 합니다. 밀라노에서는 환자가 있는 집의 문과 창문을 벽으로 막는 방식으로 환자를 격리시켰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예외적인 경우로 폴란드 지역은 거의 피해가 없었는데요, 이는 폴란드의 왕이었던 카지미에시 3세가 국경을 통제해서 외부인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는데, 당시 폴란드는 외부와의 무역 빈도가 낮았고, 농업에 집중된 사회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외에 거의 대부분의 지역은 무법지대에 가까워졌고 절망과 분노에 찬 이들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희생양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희생양은 바로 당시 사회적 소수자였던 유대인이었는데요. 당시 유대인들의 공동체에는 사망률이 낮았는데, 그 이유는 율법의 정결의식에 따라 손씻기와 질병에 대한 격리 조치가 신속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유럽인들에게 오히려 반유대주의 정서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식의 가상의 죄목으로 수천 명의 무고한 유대인을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1348년 프랑스 툴롱 지역에 처음으로 마을 사람들이 유대인 거주지를 찾아가 약 40명의 유대인을 죽였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이어서 아비뇽과 카탈루니아 지역에서도 유대인에 대한 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탄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런 공격은 더 심해졌습니다. 사부아 지역에서 이 소문 때문에 고문을 받던 유대인이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억지로 자백을 하면서 이 소문은 기정사실처럼 스위스와 독일 지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스트라스부르 지역에서는 1800여 명의 유대인 중 900여 명이 학살당하기도 했습니다.
흑사병은 시작도 불분명했지만, 쇠퇴도 분명치 않았습니다. 엄청난 전쟁을 치른 뒤 이 병의 위세가 서서히 감소되더니 유럽의 폐허 위에 고요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역병이 가져온 후유증은 금방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약 2년 반 만에 인구의 1/3이 죽었으니 그것이 남긴 사회적 변화는 가히 혁명에 비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구가 감소하자 인건비가 상승했고, 부와 권력을 누리던 지주들이 파산했고, 중세의 특징이던 봉건주의가 붕괴되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농부들은 이전보다 쉽게 좋은 땅을 구할 수 있었고, 노동자들은 더 좋은 임금을 받고 더 좋은 직장(길드)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구텐베르크가 유럽에서 최초로 인쇄술을 발명한 일에 흑사병으로 인한 인건비 상승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이전에는 필사가들이 책을 손으로 옮겨 적는 방식으로 책이 생산되었는데, 인건비가 상승하자 기계를 통해 책을 인쇄하는 방식에 대한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탄생했다고 보는 것이지요.
흑사병의 영향은 정치, 경제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변화가 나타났는데요. 예술분야에서는 흑사병을 경험하면서 고통받는 이들과 징벌받는 이들, 그리스도의 수난, 지옥의 고문 등 고통과 죽음이 예술작품의 주제가 되었고, 해골과 시체가 주로 등장하는 ‘죽음의 무도’라는 장르가 발전합니다. 피렌체의 산타크로체 성당에 그려져 있는 오르카냐의 ‘죽음의 승리’라는 작품이 대표적입니다. 사회적으로는 앞날을 헤아릴 수 없었던 생존자들은 자신도 언제 죽음으로 다가서게 될지를 알지 못하자 도덕적 삶에 의미를 두지 않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충격적일 정도로 도덕이 땅에 떨어졌고, 금욕이나 절약은 무의미한 것이 되었지요. “먹고 마시자 내일 우리는 죽을 테니까!” 이것이 미래가 없었던 중세인들의 대응이었습니다.
이렇듯 흑사병으로 인한 사회적 변화는 광범위했습니다. 개인주의가 발달하고 상업활동이 활발해졌으며 사회와 경제의 유동성도 높아졌습니다. 이러한 변화가 자본주의의 태동을 알리는 전조였습니다. 더 큰 변화는 교회 내부의 변화였습니다. 프랑스 역사자 자클린 브로솔레에 의하면 성직 지원자의 격감으로 무식하고 무지한 이들이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런 무지가 교회를 더욱 타락하게 하여 종교개혁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썼습니다.
기존의 사회 질서가 허물어지고, 사람들의 의식과 사상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무자격한 성직자들이 늘어났고 교회의 타락과 부패는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이 시작된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흑사병은 단순히 많은 사람들이 죽기만한 하나의 재앙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후의 역사 진행에 있어서 많은 변화를 가져온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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