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종교개혁자들과 흑사병
14세기의 ‘대흑사병’ 이후에도 유럽에서 흑사병은 300여년 동안 산발적으로 창궐하였습니다. 종교개혁 시기에 이를 때쯤 흑사병은 크게 사그라들긴 했지만 여전히 실재하는 위험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흑사병은 종교개혁자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고, 종교개혁자들은 흑사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대처하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루터와 흑사병
1527년 7월 루터가 사는 비텐베르크 지역에 흑사병이 발생했습니다. 8월이 되었을 때 대학은 학생들과 교수들을 다른 지역으로 피신시켜야 했습니다. 루터는 가족들, 그리고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남아 시민들을 피신시키고 환자들을 돌보기로 선택하였습니다. 루터와 그의 동료들은 루터의 집과 수도원을 이용해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러는 중에 루터의 가족과 친구들, 심지어 자녀가 흑사병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1527년 루터는 흑사병에 관한 작은 글 하나를 썼습니다. “치명적인 흑사병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가”라는 제목의 글인데요.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1525년 8월부터 11월까지 독일 브레스라우 지역에 흑사병이 번졌을 때, 그곳의 목회자인 헤쓰가 루터에게 제목과 같은 질문을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흑사병이 발생하면 성주에 명령에 따라 백성들은 도시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때 노약자와 감염된 병자를 두고 떠났다는 것이지요. 이 때 목회자는 성주의 명령이나 자신의 안전을 이유로 피난할 수 있을까요? 또 당시에는 흑사병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보았는데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벌을 피해 도망치는 것은 불신앙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루터는 어떤 답변을 주었을까요?
루터는 죽음 앞에서 그리스도인이 선택할 수 있는 바른 두 가지 태도를 말합니다. 먼저 죽음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부인해야 한다면 마땅히 죽음을 선택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섬기는 직분을 가진 사람들, 즉 목사와 같은 영적 직분자와 시장, 판사와 같은 공직자들은 하나님의 종들로서 맡겨진 사람들을 버리고 도망가서는 안됩니다. 루터는 요한복음 10장 12절 말씀을 통해 선한 목자는 자신의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말하며,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곁에서 힘과 위로가 되어주고, 죽기 전에 성찬을 베풀어줄 선한 목자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루터는 루터는 마태복음 25장 43절의 말씀(내가 병들었을 때 … 너희가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을 인용하며, 이웃이 죽어가고 있고, 그를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모른체 하거나 피하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루터는 흑사병은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에 피하면 안된다고 말하는 운명론자들을 향해서는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집에 불이 났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물에 빠졌을 때 수영하지 말고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익사해야 하는가? 다리가 부러졌을 때 의사의 도움을 받지 말고 ‘이건 하나님의 심판이야, 저절러 나을 때까지 참고 버텨야 해’라고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배고프고 목마를 때 당신은 왜 먹고 마시는가? 이제 우리는 ‘우리를 악에서 구해주소서’라고 기도하면 안되는가? 만일 누군가가 불이나, 물이나, 고통 가운데 있다면 나는 기꺼이 뛰어들어 그를 구할 것이다.”
루터는 약의 사용이나 흑사병에 걸린 사람, 장소를 피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향해 경솔하고 분별없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것이 자신의 강한 믿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루터가 볼 때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을 주셨고, 우리에게 약에 대한 지식을 주셔서 그것을 통해 우리 몸을 지키고 보호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약이나 방역 지식에 따라 적절하게 대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죽음을 피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연적인 본성이기 때문에 믿음이 연약한 신자에게 병자를 돌보도록 강요하거나, 위험을 피해 도망치는 것을 정죄해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참여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은혜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이 편지에서 흑사병을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참된 믿음과 이웃사랑의 시험무대”라고 설명했는데, 루터의 입장을 잘 요약해주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1527년 흑사병이 비텐베르크를 강타했을 때 루터의 설교를 인용하며 마칩니다.
“하나님께서 치명적인 전염병을 주셨을 때, 나는 이 병을 막아달라고 주님께 자비를 구하며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다음, 집에 연기를 피우고 환기를 시키면서 약을 받아먹어야 했습니다. 나를 꼭 필요로 하지 않는 곳이라면 가지 않고 피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킬 수도 있고, 나의 사소한 부주의가 이웃을 죽이는 원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달려갈 것입니다. 이웃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사람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가 어떤 일이든 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신앙입니다. 그 신앙은 어리석거나 뻔뻔하지 않으며, 사람을 선동하거나 미혹하지 않습니다.”
(2) 츠빙글리와 흑사병
1519년 1월 츠빙글리는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 성당의 주임사제로 취임하여 사역을 시작합니다. 같은 해 스위스 전역에 흑사병이 확산되었고, 8월에는 취리히의 전염자가 최고치에 육박하게 됩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이 때 취리히 인구의 25%가 감소하였다고 합니다. 이 때 츠빙글리의 자녀도 병으로 죽게 되고, 츠빙글리 자신도 병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다가 9월 경 자신도 감염되어 앓아 눕게 됩니다. 10월에 죽음의 위기를 맞이해지만, 다행히 11월 중순경 극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목회 사역을 시작할 때의 이 경험이 츠빙글리에게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 때의 경험이 1519년 12월에 쓴 “페스트의 노래”(역병가)에 잘 담겨 있습니다.
“페스트의 노래”는 3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절은 투병초기, 2절은 투병기간 동안, 3절은 투병생활을 마감하고 건강을 회복하게 되면서 느끼는 신앙적 감회를 시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페스트의 노래” 전문(임걸 번역)은 아래와 같습니다.
1절(투병초기)
도와주세요. 주 하나님, 도와주세요. 이 고통에서!
죽음이 문 앞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여, 죽음과 싸워주세요. 당신은 죽음을 이기셨잖아요.
당신을 향해 부르짖습니다.
죽음이 당신의 뜻이라면, 저를 파괴하는 이 죽음의 화살을 빼주세요.
이 치명적인 화살은 저에게 단 한 시간의 평안도 안식도 주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한참 살아야 하는 날에 당신은 내가 죽기를 원하시는지요.
당신이 원하시면, 저는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당신의 그릇입니다. 저를 다시 세워놓으시거나 깨뜨려버리십시오.
만약에 당신이 내 영혼을 이 땅에서 거두어 가신다면 내 영혼이 더 망가지지 않도록,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공의로운 섭리를 더럽히지 않도록 그렇게 해 주십시오.
2절(투병하는 동안)
도와주세요. 주 하나님, 도와주세요!
나의 병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압박이 제 영혼과 몸을 옥죄어오고 있습니다.
나의 유일한 도움이신 하나님, 은혜를 베푸사 저에게 오세요.
당신의 은혜는, 오직 당신에게 간절한 소망과 희망을 두는 사람들과
이 세상의 이익과 손해에 초연한 사람들을 인생의 사슬에서 반드시 자유롭게 하십니다.
이제 마지막이 가까이 왔습니다.
내 혀는 굳어졌고 더 이상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제 감각은 완전히 굳어버렸습니다.
이제 당신이 저를 위해서 계속해서 싸울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발악하는 악마와 사악한 그의 공격에 버틸 수 있는 힘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렇게 악마가 날 뛸지라도, 제 영혼은 당신만을 믿겠습니다.
3절(건강이 회복되며)
저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주 하나님, 저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제가 다치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 땅에 있는 저를 죄의 불꽃이 더 이상 사로잡지 못할 것이라고 믿으실 때,
내 입술은 항상 그렇듯이 순수하고 숨김없이 당신을 향한 찬양과 당신의 가르침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선포할 것입니다.
아마도 죽음의 형벌이 그 언젠가 나에게 닥칠 것이지만
아마도 지금보다 더 심한 고통을 겪을 것이지만; [그 때는 지금보다 더 잘 생을 마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저는 이미 죽은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세상의 폭압과 폭력에 맞서서 그 어떤 두려움도 없이,
천국에서 받을 상을 바라보면서 당신의 도움만을 의지하여 참을 것입니다.
당신이 안계시면 아무것도 완전할 수 없습니다.
흑사병에 전염되어 죽음의 위기를 벗어나 회복된 츠빙글리는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페스트의 노래는 로마서 9장의 ‘토기장이와 토기의 비유’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요. 츠빙글리는 하나님은 토기장이시고, 자신은 토기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토기와 같이 연약한 존재인 인간은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손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그분의 섭리에 대한 강한 확신의 근간이 됩니다. 이것이 츠빙글리의 신학을 형성하는 중요한 재료가 되고, 에라스무스의 성경인문주의(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낙관적 이해)를 극복하고, 루터의 종교개혁(예, 가톨릭교회의 미사예식을 수정하여 사용한 것)보다 더 철저한 종교개혁을 추진하는 일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3) 불링거와 흑사병
취리히 교회에서 불링거가 사역하는 동안 1535년, 1541년, 1549년, 1564-5년, 그리고 1569년에 흑사병이 창궐했습니다. 그중 1564-5년에 유행한 흑사병이 가장 참혹했습니다. 츠빙글리가 감염되었던 해인 1519년과 유사하게 이때도 취리히 인구의 1/3이 사망하였습니다. 불링거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그의 동료들이 흑사병에 감염되었고, 죽었습니다. 불링거는 자신의 일기장에서 그 힘겨웠던 시간들을 인상 깊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서기 1564년 9월 15일 저녁, 그 날은 금요일이었는데, 나는 식사 이후에 흑사병으로 인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이 흑사병은 이미 취리히에 만연하였다. 나는 세 곳에 발생한 흑사병 종기들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하나는 왼쪽 허벅지 앞면 가장 근육이 많은 부위 중간에 있고, 무릎 아래 오른쪽 종아리에 있는 것은 근육의 바깥쪽 위에서 곪았는데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같은 오른쪽 허벅지 위쪽 살에 동일한 종류의 종기를 가졌다. 그것 때문에 나는 낮과 밤에 잠을 거의 자지 못할 정도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강렬한 통증을 머리와 옆구리 쪽에서 느꼈다. 의사들은 규칙적으로 방문을 했다. 무랄토(Muralto)는 무릎 아래의 종기를 불로 태우는 소독을 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치료자이시다. 병든지 17일 째가 되던 날에 나는 교회의 모든 봉사자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으며 또 그들이 의연하고 충성스럽게 일을 감당하고 결속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교회를 위한 책임을 전달하였다.
그 다음날 밤에 흑사병은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내인 안나 아들리슈빌러를 불러갔다. 그녀는 9일 동안 병으로 누워 있었는데, 깊은 신뢰로 하나님께 간구했지만, 그러나 9일째 되던 날 병상 위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 일은 9월 25일 월요일 정오에 발생했다. 그녀는 같은 달 26일인 그 다음날 정오에 모든 도시로부터 온 많은 일반 사람들과 명망이 있고 존경을 받은 인사들의 화려한 환송 가운데서 엄숙하게 묘지에 안장되었다. … 10월 27일 새벽 4시에 흑사병은 나의 사랑하는 딸인 마가렛타 라바터를 엄습했다. 그녀는 다음 날인 10월 28일에 아들인 베른하르트를 출산했는데, 그는 겨우 이틀이 지난 10월 30일에 유아세례를 받았다. … 그 아이는 다음날 밤에 죽었고, 그의 엄마는 이미 10월 30일 밤 11시경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31일 오후 4시에 흙 속에 묻혔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입구에서 그녀를 마지막으로 전송하였다. 그녀는 칼스투엄 묘지에 안장되었다.
나는 11월 16일에 간신히 병상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나는 12월 4일에 거의 6주가 지난 후에 완치된 종기를 절개하였는데 … 특별히 나는 매우 긍휼함을 받은 것이다. 그 당시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하나님께 돌아가며 다른 가족들처럼 교회에서 다시금 전송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나의 생명을 위해 하나님께 솔직하게 기도했었다. 그리고 의사들과 다른 모든 동료들이 나의 생명을 이미 포기했으며 … 내가 죽을 것이라는 소문이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나의 대적들은 기뻐했으며, 성도들은 슬퍼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자신의 놀라운 은혜를 선물하였다.”
1564-5년은 불링거의 생애에 가장 슬픈 해였습니다. 사랑하는 안내와 세 딸과 손자의 죽음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비극적인 가족사는 그에게 큰 아픔과 상실감을 안겨 주었지만, 불링거는 가족에 대한 아픔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묵묵히 견뎌냈습니다. 이것은 1535년 자신이 쓴 ‘병자들의 보고서”라는 책의 내용에 일치되는 행동이었습니다. “병자들의 보고서”는 1535년 8월부터 12월까지 취리히에 발생했던 흑사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에 안타까워하던 불링거가 그해 10월에 출간한 책으로, 종교개혁 시대 개신교 영역에서 질병과 관련된 문제를 목회적 관점에서 다룬 최초의 책입니다. 핵심은 부활과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죽음은 복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죄와 비참함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참된 위로, 참된 영광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불링거는 이렇게 천상의 소망 중에 있는 죽음을 말하면서 동시에 흑사병과 같은 질병에 걸린 환자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의사의 처방과 치료를 받는 것이 당연한 의무임을 잊지 않고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1564년 흑사병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을 잃었을 때 불링거는 자신이 말한 대로 실천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 속에서 삶의 고난을 묵묵히 감당하며 천상의 소망을 더욱 힘있게 붙들었고, 참된 위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에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드러냈습니다. 신자들에 앞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목자로서 위로적 모범을 실천한 것입니다. 당시 흑사병으로 가족을 잃은 신자들은 불링거의 신앙적 자세를 보면서 위로를 얻고 인내할 수 있었고, 취리히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비켜간 사람들은 슬픔과 고통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자의 몫을 다시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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