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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병철 안

종교개혁자, 존 칼빈의 삶과 신앙(3)

최종 수정일: 2022년 11월 15일




제1차 제네바 개혁기

기욤 파렐의 강권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인 칼빈은 1536년부터 7월부터 1538년 4월까지 제네바에서의 사역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 때를 ‘제1차 제네바 개혁기’라고 말합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제네바 교회를 세우기 위해 몰두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세 개의 문서를 만들었는데, 첫째는 1536년 11월 10일에 의회에 제출한 「제네바 신앙고백서」입니다. 총 21장으로 이루어진 이 문서 성경(1장)과 하나님에 대하여(2-3장), 인간의 타락한 본성(4-5장),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6-7장), 성령에 의한 중생(8-11장), 기도(12-13장)와 세례와 성찬(14-16장), 교회(18장)와 권징(19장), 직분(20장)과 교회와 국가의 관계(21장)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간단명료하게 진술한 문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1장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장 하나님의 말씀
첫째, 우리는 신앙과 종교의 규칙으로 오직 성경만을 따르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탈한 사람들의 견해에 의해서 고안된 그 어떤 다른 것들과도 혼합시키지 아니하고, 우리 주님의 명령을 따라서 덧보태거나 삭제하지 아니하고 그 말씀에 의해서 우리에게 전해진 것 이외에 우리의 영적인 관리를 위해서 다른 어떤 교리를 바아들이기를 원하지 아니하기를 소망함을 선포한다.

칼빈은 제네바 신앙고백의 가장 첫 머리에서 “오직 성경”만을 신앙과 종교의 유일한 규칙으로 선언합니다. 즉, 칼빈은 외경이나 교회의 전통(교황이 공식적으로 선언한 문서나 교회회의의 결정 사항, 그리고 교회가 관습적으로 행해오던 관계나 관행, 행동규법, 종교적 체험, 경신의식, 그리고 공의회의 문헌 등)을 성경과 동일한 권위로 받아들였던 가톨릭 교회의 주장을 거부하고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법칙임을 주장했고 그 토대 위에서 교회를 개혁해 나가고자 하였습니다.

두 번째 문서는 칼빈이 1537년 1월 16일에 시의회에 제출한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조례」(Articles on the Organization of the church and its worship at Geneva)입니다. 이 문서에는 크게 두 가지 내용이 실려 있는데, 하나는 매 주일 예배 때마다 성찬을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칼빈은 적어도 매월 한 번씩 성찬을 거행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로마 교회의 미사에 대한 추가 설명] 또한 칼빈은 엄격한 권징을 시행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칼빈은 교회가 건전한 교리와 생활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는 세속 정부가 아닌 교회에 의한 권징이 시행되어야 할 것을 제시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한 칼빈의 말을 들어봅시다.

우리는 이를 시행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선한 생활을 하고 있고 모든 신실한 사람들의 증거가 있으며, 쉽게 오염되지 않고 견고한 사람들을 선출하여 지정할 것을 여러분들께 제안합니다. 그들이 이 도시의 모든 지역마다 배치되어서 생활을 감독하고 그들의 각 관정들을 감독하고, 만일 어떤 사람의 죄악이 현저하게 사악하여 드러난다면 그들이 목사들과 함께 의견을 교환하여, 형제 사랑으로 그 죄악을 지적하고 훈계하여 권고하는 것입니다...그리하여 만일 그가 자신의 실수를 발견하게 된다면 이 권징의 유익이 얼마나 큰 것이 되겠습니까

세 번째 문서는 청소년들을 교육하기 위한 「제네바 요리문답」(Geneva Catechism)입니다. 칼빈은 1537년 1월에 「기독교강요」의 내용을 주로 요약한 교리문답서를 출판하였고, 이것으로 자녀들을 교육하도록 하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간단한 개요가 모든 자녀들에게 반드시 가르쳐져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일정한 나이에 이르면 자녀는 목사 앞에 나가서 질문을 받고 시험을 거쳐서, 각자의 정도에 따라서 그들이 만족할 만큼 교육을 받았다고 입증될 때까지는 충분한 설명을 들어야만 할 것입니다.

이처럼 칼빈은 제네바를 개혁 신앙의 도시로 만들기를 원했으나 이러한 그의 노력은 번번히 여러 반대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칼빈은 제네바의 모든 시민들이 「제네바 신앙고백서」와 「제네바 요리문답」을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고 그 가르침을 따라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나 재세례파 등 여러 복잡한 가르침이 난무하는 시대 속에서 제네바의 교회가 성경에 기초한 일치된 신앙을 가지고 흔들림 없이 세워져 가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칼빈의 이러한 바람과는 달리 제네바 시민들은 강하게 반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전히 제네바에 남아 있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지지자들은 물론, 프랑스 출신의 외부인인 칼빈이 주도하는 개혁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권징과 관련하여 칼빈은 권징의 권한이 교회에 있다고 주장했지만 제네바 시의회는 그것이 시의회의 권한이라 주장하며 마찰을 빚기도 하였습니다. 또 칼빈과 파렐의 주도하는 교회의 개혁이 자신들의 삶을 지나치게 통제한다고 느끼며 반발하던 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결국 1538년 1월에 칼빈과 파렐은 출교권을 박탈당하게 되었고 흥분한 군중들이 흉기를 들고 칼빈과 파렐를 위협하여 신실한 사람들이 그들을 보호하여 집으로 돌려보내야만 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해 4월 시의회는 칼빈과 파렐을 제네바에서 추방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처럼 큰 열정을 가지고 사역했던 제네바에서 쫓겨나야 했던 칼빈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추방 결정을 통지 받은 후 칼빈이 시의회에 보낸 답변이 그의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자, 이제야 올 것이 왔구나! 만일 우리가 사람을 섬겼다면, 우리는 정말 잘못된 대우를 받은 것이지만, 우리가 위대하신 하나님을 섬겼으므로 그분이 우리에게 보답해 주실 것이다.

스트라스부르에서의 성숙과 발전


제네바에서 추방당한 칼빈은 바젤에서 조용히 지내고자 하였습니다.

나는 주님이 내게 대해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기다리면서 바젤에 은거할 생각이다. 그 이유는 내가 이 도시 사람들에게서 손님으로 환대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무엇보다도 내가 처하였던 곤경을 생각할 때 이제 벗어버리게 된 짐을 다시 짊어지기가 두렵다

아마도 제네바에서의 사역과 실패로 인해 칼빈은 몸도 마음도 매우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쉬고 싶다는 꿈을 다시 한 번 접어야 했는데, 스트라스부르에 있던 개혁자 마틴 부처가 마음의 큰 고통을 안고 바젤에 머물던 칼빈을 초청한 것입니다.

칼빈보다 열여덟 살 많았던 부처는 원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제였습니다. 그런 중 독일의 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하이델베르크 어거스틴파 수도원에서 논쟁할 때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가 루터의 신학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되고 그 후 루터와의 대화를 통해 개혁신앙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특히 루터의 유명한 교리, 죄인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인이 된다는 것과 우리를 규정하고 지배하는 유일한 원천은 교회가 아니라 ‘오직 성경으로만’ 근거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습니다.

마틴 부처는 매우 온유하고 온건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당시 개혁자들 사이에서 ‘화해자’라는 별명으로 불려졌는데, 그 이유는 그가 성찬과 관련하여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독일과 스위스의 개혁자들을 설득하고 공동의 신앙고백을 위해 동분서주하며 많은 애를 써온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젊은 신학자 칼빈이 제네바에서 추방을 당해 바젤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스트라스부르로 와 줄 것을 요청합니다. 당시 상황을 칼빈은 「시편 주석」 서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어떠한 공직도 맡지 않고 조용하게 살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탁월한 종 마틴 부처가 이전에 파렐이 했던 것과 유사한 권고와 단언으로 나를 다른 직책으로 다시 불러내었다. 그가 내 앞에 요나의 예를 제시할 때에, 나는 다시 가르치는 짐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스트라스부르로 가게 된 칼빈에게 부처는 당시 종교 자유를 찾아 프랑스로부터 스트라스부르로 몰려왔던 난민들을 맡아 목회할 것을 제안합니다. 당시 프랑스의 왕과 귀족들은 엄격하게 종교개혁을 반대하고 핍박하였습니다. 그래서 수 많은 사람들이 주변 도시와 국가들로 피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중 하나가 스트라스부르였습니다. 하지만 스트라스부르는 독일어권에 속한 도시였고 따라서 프랑스 피난민들은 예배를 드리기 매우 어려운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칼빈이 오게 되어 자체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독립된 교회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곳에서 칼빈은 매우 행복한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제네바에서 하기를 원했지만 번번히 반대에 마주할 수 밖에 없었던 일들을 얼마든지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이곳에서 칼빈이 이룬 일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 하나는 개혁 교회의 예배 모범을 구체화한 것입니다. 그는 기도와 시편찬송, 설교와 성찬이 중심이 된 예배 형식과 순서를 마련했고 여기서 칼빈이 예배의 형식은 후에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그리고 미국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여기서 칼빈은 일주일에 네 번식 설교를 했고 성례는 매월 시행되었습니다. 또 권징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네바에서도 칼빈은 매월 성례를 시행할 것을 건의했지만 반대로 인해 무산되었고 권징에 있어서도 그 권한이 교회에 있느냐 아니면 시의회에 있느냐를 두고 많은 반대를 만났지만 여기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간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목사로 불러주셨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고 이러한 확신은 칼빈의 의욕과 사명감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있었던 중요한 일 중 하나는 그곳에서 이들레뜨 드 뷔르라는 여인과 결혼한 것입니다. 그 동안은 학업에 집중하다가 피난민으로 고향을 떠나야 했고, 또 제네바에서는 개혁 운동에 몰두하느라 집을 갖거나 결혼을 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로마 교회의 사제들처럼 독신으로 살겠다는 서원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스트라스부르의 동료 개혁자였던 부써는 칼빈의 결혼을 추진하였습니다. 마침 그 무렵 칼빈의 친구이자 동료 개혁자였던 비레가 결혼하였고, 부써는 그의 예를 들어가며 건강을 돌보아 줄 사람을 찾아 결혼하도록 설득하였습니다. 또 칼빈도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결혼에 대한 바램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파렐과 상의하였는데, 그와 주고 받은 편지에는 칼빈 목사님의 이상적인 아내상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나는 한 번 미끈한 미모를 보고는 그 아름다움에 사로잡혀서, 심지어 그 상대방의 모든 악한 것까지도 포용해 버리는 사랑에 미쳐버린 그런 부류의 사람은 아닙니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미모는 이것입니다. 즉, 아담하면서 공손하고 검소하고 절약할 줄 알고 인내심이 많으며 나의 건강에 관심을 갖고 잘 돌보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1540년 8월에 이들레뜨 드 뷔르라는 여인과 결혼하였습니다. 이들레뜨 드 뷔르는 처녀는 아니었고 두 남매를 기르고 있던 과부였습니다. 그의 전 남편은 벨기에 사람이었는데, 가족들과 함께 스트라스부르로 들어왔다가 난민 교회에서 칼빈의 가르침과 설교를 듣고 개혁신앙을 받아들인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흑사병에 걸려 아내와 두 자녀만을 남기고 죽고 말았습니다. 여하튼 칼빈은 이들레뜨 드 뷔르와 결혼하였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자크가 출생 후 며칠 만에 병으로 죽었고 또 이들레뜨는 분만으로 얻은 병으로 인해 병약한 생활을 하다가 1549년 3월에 생을 마감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칼빈은 큰 슬픔과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런 칼빈의 마음은 친구 비레에게 보낸 편지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비록 내 아내의 죽음이 내게는 견딜 수없는 고통이긴 하지만 아직 나는 이 슬픔을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라앉히고자 애쓰고 있소이다...나는 나의 생애에 최고의 동반자를 잃게 되었소이다. 만일 우리들의 운명이 더욱 가혹해진다면, 그녀는 추방을 당하거나 가난에 빠져도 기꺼이 나와 함께 고생을 나누어질 사람이었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을 반려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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