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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병철 안

창세기 44장(2/11)

자기 백성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큰 뜻을 알게 되었을 때, 요셉은 형들에 대한 원한을 내려놓고 그들을 진정으로 용서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형들을 시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형들이 자신에게 저지른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고 있는지 알아야 했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동생 베냐민에 대한 형들의 태도를 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의도적으로 베냐민을 데려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고, 거기서 요셉은 형들을 마지막으로 시험했습니다. 그것이 창세기 4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이 가나안으로 돌아가기 전날 베냐민의 짐 속에 자신의 은잔을 넣도록 명령합니다. 다음날 아침 애굽을 떠난 형제들을 쫓아가 짐을 뒤지게 하였고,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을 찾아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형들은 옷을 찢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왔습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형들은 서로를 탓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평생 노예로 살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지만 그들은 침묵하고 한 몸처럼 움직였습니다. 형제들이 돌아왔을 때 요셉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아마도 요셉은 그곳에서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이 일들을 통해서 형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게 되기를, 그리하여 위기에 처한 동생 베냐민을 위하는 회개의 증거를 형들에게서 볼 수 있기를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요셉은 돌아와서 자신 앞에 엎드린 형들을 엄한 목소리로 추궁하였습니다. 요셉은 그 자루에서 잔이 발견된 베냐민만 남아 요셉의 종이 되고 나머지 형제들은 아버지에게 돌아가도 좋다고 합니다. 이전 요셉을 팔아 넘겼을 때의 형들이었다면 요셉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베냐민을 구하기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특별히 유다의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다의 말의 논지는 매우 분명합니다. 동생 베냐민은 반드시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베냐민이 아버지 야곱이 특별히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베냐민은 아버지가 노년에 얻은 어린 소년인데, 그의 형은 죽었고, 그의 어머니가 남긴 자식은 베냐민 하나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하는 아들이기에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려오기까지 아버지를 어떻게 설득했는지, 또 베냐민을 보냈던 아버지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는지 말합니다. 30절에는 유다가 하고자 했던 말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다는 베냐민의 생명은 자신과도 묶여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고 말합니다. 32절에서 그가 자기 목숨을 대신해서라도 베냐민을 데려오겠다고 약속했던 것을 말합니다. 33절은 이 모든 말의 결론입니다.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우리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어 있다’는 유다의 말을 신약 성경의 언어로 바꾼다면, ‘우리는 한 몸입니다’가 될 것입니다. 형제들을 대표하고 있는 유다에게서 이전에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악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유다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희생을 보시고 성부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간구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희미하게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20여년 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자기 백성들의 죄악을 다루고 계셨습니다. 그 결과 이제 그들은 진정으로 서로를 위하였고, 서로의 생명과 복지를 진정으로 위하는 하나님의 백성 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은 세상의 정신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피로 값없이 구속함을 받은 우리는 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되고, 저들의 슬픔은 곧 우리의 슬픔이 됩니다. 이 하나됨을 힘써 지켜나갑시다. 서로를 내 몸과 같이 아끼고 사랑하는 청년부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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