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의 생애와 사상(2) 1534-1540년까지
바젤
콥의 연설 사건 이후 칼뱅은 앙굴렘으로 피신합니다. 그곳에는 좋은 친구 루이 뒤 틸레(Louis du Tillet)가 있었고, 그의 집에는 풍성한 장서를 갖춘 서재가 있었습니다. 덕분에 칼뱅은 이 기간 동안 독서와 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는데요, 특별히 초대교회 교부들의 책을 탐독하였고, 기독교강요에 대한 구상과 집필도 이 무렵 시작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유와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534년 벽보사건의 영향으로 칼뱅은 더이상 프랑스에 머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콥이 망명한 바젤로 떠나기로 합니다. 그 무렵 바젤은 종교개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피난처이자 학문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었고, 조용히 연구하며 글을 쓰고 싶었던 칼뱅에게 가장 적합한 장소처럼 보였습니다. 이곳에서 칼뱅은 많은 종교개혁자들과 교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1535년 1월 칼뱅과 뒤 틸레는 스트라스부르를 거쳐 바젤에 도착합니다. 당시 인쇄, 출판 산업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바젤에서 칼뱅은 그의 필생의 역작인 “기독교강요”를 출판하게 됩니다(1536년). 칼뱅은 부당하게 박해받는 프랑스 개혁교회 성도들의 신앙이 성경적인 참된 신앙임을 변호하기 위해서 기독교강요를 집필하였습니다. 또한 성경과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체계적으로 요약하고 정리하여, 교육과 신앙고백에도 적합하게 기록되었습니다. 이후 칼뱅은 평생에 걸쳐 이 책을 증보하여 1559년 최종판(5판)을 발간하게 됩니다. 작은 소책자에서 4권으로 분량은 크게 늘어났지만, 칼뱅의 신학과 사상은 거의 변함없이 이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초판은 여전히 칼뱅 신학의 정수, 요약으로 평가받습니다.
<기독교강요를 집필하는 칼뱅, 개혁주의학술원 홈페이지>
기독교강요를 출판한 후 칼뱅은 잠시 이탈리아의 페라라로 갑니다. 페라라 공작부인이며 루이 12세의 딸인 르네는 많은 위그노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었는데요, 칼뱅은 그녀를 존경하며 평생 교제를 이어갔습니다. 이후 칼뱅은 잠시 누아용에 들려 모든 가사를 정리하고, 동생 앙투안, 누이 마리를 데리고 스크라스부르 또는 바젤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나섭니다. 하지만 전쟁으로 길이 막히고 칼뱅은 원치않게 제네바로 우회하는 길로 돌아가게 됩니다.
제네바(1차)
칼뱅은 조용히 제네바를 통과하려고 했지만, 페라라에서 나설 때 칼뱅과 헤어져 제네바로 와 있었던 뒤 틸레가 칼뱅이 온 것을 알고 흥분해서 기욤 파렐에게 알립니다. 앞서 제네바에서 종교개혁 운동을 하던 파렐은 열정적으로 활동하였지만 사역이 성공적이지는 못했습니다. 이미 기독교강요를 읽고 칼뱅을 알았던 파렐은 제네바가 개혁되기 위해서 칼뱅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칼뱅이 제네바에 왔다니, 파렐은 당장 칼뱅을 찾아가 ‘하나님께서 당신을 제네바에 보내신 것’이라며, 제네바에서 함께 일하자고 강청합니다. 물론 칼뱅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지요. 칼뱅의 바람은 그저 조용히 연구하며 글을 쓰며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연구를 핑계로 거절하는 칼뱅에게 파렐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만일 네가 여기서 우리와 함께 주님의 일에 힘쓰지 않는다면, 주님은 너 자신만큼 그리스도를 추구하지 않는 너를 저주하실 것이다”(베자, 60). 칼뱅은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나는 <기독교강요>의 저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제네바에 머물러야 했을 때까지 그런 식으로 비밀을 유지할 생각이었다. 숙고나 설득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욤 파렐의 끔찍한 위협 때문이었다. 마치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직접 그 사람의 손을 통해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셀더하위스, 79). 이렇게 파렐의 호통과 저주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본 칼뱅은 자신이 원했던 평온한 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제네바의 종교개혁자로 나서게 됩니다. 이때가 1536년 7월경이었습니다.
<칼뱅을 강권하는 파렐, 개혁주의학술원 홈페이지>
칼뱅의 제네바 사역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제네바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네바가 종교개혁에 동참한 데는 신앙적 동기보다 정치적 이유가 컸습니다. 당시 제네바는 사보이 공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도시 국가로 남고자 했습니다. 사보이 공국의 정치적, 군사적 위협에 맞서기 위해 베른과 군사 동맹을 맺었고 베른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빚을 지기도 하였지요. 종교개혁 신앙을 따르는 베른과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서 제네바도 종교개혁 신앙을 선택하게 됩니다. 1535년 초여름 제네바는 가톨릭 미사를 폐지한다고 발표하였고, 그해 가을 “어둠 뒤에 빛”(post tenebras lux)이라는 종교개혁 표어가 새겨진 주화도 발행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수의 시민들은 여전히 종교개혁 신앙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1536년 8월부터 칼뱅은 신약성경과 언어를 가르치며 ‘제네바의 성경 교수’로 사역을 시작합니다. 여러 국제적인 토론에 참여하여 두각을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1년 후 칼뱅은 공식적으로 목사로 임명받고 사역을 시작하게 됩니다. 1537년 1월 칼뱅을 비롯한 제네바 목사회는 “제네바 교회 조직과 예배에 관한 규정”을 시의회에 제출합니다. 크게 다섯 가지 주제를 다루는데, (1) 성찬이 정기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2) 성찬이 제대로 시행되기 위해 교회의 치리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3) 시편으로 찬송해야 한다. (4) 요리문답으로 어린이 교육을 시행해야 한다. (5)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한 결혼법을 대체할 법규를 제정해달라. 이 “규정”이 승인된 후 칼뱅은 곧바로 33개의 항목으로 된 신앙교육서를 작성하여 보급합니다.
1536년 11월 칼뱅과 파렐은 21개의 조항으로 된 신앙고백서를 제네바 시의회에 제출합니다. 다음해 3월 의회는 출교권이 명시된 이 신앙고백서를 채택합니다. 칼뱅과 파렐은 모든 제네바 시민들이 신앙고백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성찬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성찬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칼뱅은 교회의 치리를 받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성찬을 바르게 시행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힙니다. 불행하게도 다음해 행정 장관으로 선출된 네 사람은 칼뱅과 파렐에 적대적인 인물들이었고, 시의회는 칼뱅과 파렐이 제시한 규정이 아닌 베른의 규정을 채택하고 요구했습니다. 시의회와 팽팽하게 맞서던 칼뱅과 파렐은 결국 제네바에서 추방당합니다. 베자는 “더 많은 쪽이 더 나은 쪽을 이기게 되었다”고 평가하였는데요, 처음부터 신앙적인 동기에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네바는 칼뱅의 철저한 개혁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추방당하는 파렐과 칼뱅, 개혁주의학술원 홈페이지>
스트라스부르
1538년 5월, 제네바에서 추방당한 후 파렐은 뇌샤텔에서 청빙을 받고, 칼뱅은 바젤을 거쳐 스트라스부르로 가게 됩니다. 칼뱅의 소식을 들은 마르틴 부처(Martin Butzer)가 칼뱅을 초청한 것인데요. 당시 스트라스부르는 독일어권이었지만 많은 프랑스 난민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칼뱅은 프랑스 난민교회를 담당하는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칼뱅보다 17살 위였던 부처는 종교개혁 진영의 리더였고, 사려깊고 포용적인 목회자였습니다. 부처의 지도 아래 칼뱅은 비로소 목회자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칼뱅이 제네바에서 시행하고자 했던 많은 것들이 스트라스부르에서는 부처에 의해 이미 시행되고 있었기에, 칼뱅에게는 목회적 경험을 가질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스트라스부르는 종교개혁자요 목회자로서 칼뱅의 고향이 됩니다. 이곳에서 칼뱅은 신학자요 목회자로서 자신을 형성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르틴 부처와 칼뱅이 사역했던 스트라스부르 성 니콜라 교회>
1539년부터 칼뱅은 요한네스 슈투름(Johannes Sturm)이 학장으로 있던 스트라스부르 아카데미에 교수로 취임하여 성경 주석을 담당하게 됩니다. 슈투름과의 만남과 학교 경험은 훗날 제네바 아카데미의 모태가 됩니다. 1539년 7월 칼뱅은 스트라스부르 시민권을 얻고, 8월에는 기독교강요 재판을 출판합니다. 6장으로 된 초판에 비해 17장으로 분량이 약 3배 정도 늘어났습니다. 다음 해 8월에는 부처의 소개로 이들레트 드 뷔르(Idelette de Bure)와 결혼합니다. 그녀는 연상의 과부였고, 두 아이가 있었습니다. 칼뱅은 그녀를 “내 인생의 훌륭한 동반자, 내 사역의 신실한 조력자, 보기 드문 여성”이라 부르며 아꼈습니다. 이렇게 칼뱅이 스트라스부르에서 지낸 기간은 그의 생애 가장 유익하고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칼뱅이 떠난 제네바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제네바를 돌아오게 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요. 칼뱅이 없는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습니다. 1539년 3월, 제네바에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합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지성적이고 개혁적이라고 알려진 사돌레토 추기경이 공개서한을 보낸 것입니다. 사돌레토는 제네바가 어머니 교회에서 분리된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며, 비록 로마 교회 안에 오류들이 있지만 교회를 분열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갱신해 나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종교개혁자들의 칭의 교리는 사람들을 방종하게 하고 분열시킨다고 비판하며 어머니 교회로 돌아오라며 제네바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합니다. 당시 제네바에는 이 편지에 대응할 사람이 없었고, 결국 시의회는 칼뱅에게 답신을 요청합니다. 이에 칼뱅은 “사돌레토에게 주는 답신”(1539)을 작성하여 종교개혁 신앙을 탁월하게 변호합니다.
칼뱅은 원치 않았지만 하나님의 섭리라 인정하고 제네바의 종교개혁에 참여합니다. 칼뱅은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추방이었습니다. 대실패였지요. 그러나 칼뱅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는 아니었습니다. 베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것이(칼뱅의 추방) 제네바 교회에 확실한 손실을 가져왔다고 누군들 평가하지 않았을까? 반대로 이 사건은 하나님의 섭리로 다음 결과를 보여주었는바, 한편으로는 다른 곳에서의 신실한 종들의 활동에 의해 다양한 경험의 실행이 그를 더 나은 일로 훈련시킨다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저 선동가들이 그들 자신의 폭력으로 뒤집어진 후 제네바 교회가 많은 더러움에서 정화된다는 것이다. 그 후 사실 자체가 이 모든 것을 입증했다”(베자,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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