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의 생애와 사상(4) 1555-1564년까지
1555년 제네바의 권력 구도가 극적으로 재편됩니다. 이 일은 1550-1560년 사이에 제네바의 인구가 급증한1555년 제네바의 권력 구도가 극적으로 재편됩니다. 이 일은 1550-1560년 사이에 제네바의 인구가 급증한 것과 관련이 있는데요. 인구가 급증한 주된 이유는 제네바로 피신한 개신교 난민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난민의 대부분은 프랑스 출신으로 전문 기술자들이 많았습니다. 개중에는 부유하고 교육수준과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도 있었지요. 당연하게도 이들은 칼뱅을 열렬히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시민권이 없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칼뱅에게 도움을 줄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 제네바에서 외부인들은 선거권만 있고 피선거권은 없는 2등 시민권(부르주아)만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554년까지는 시민권 승인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1555년, 제네바 시의회는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자격을 갖춘(부유하고 명망 있는) 난민들에게 시민권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이때 많은 프랑스 난민들이 시민권을 사서 선거권을 갖게 됩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은 시의회는 이들의 투표권을 차단하려 했지만 실패합니다. 이후 투표를 통해 시의회는 칼뱅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채워지게 됩니다. 비로소 칼뱅은 제네바의 종교개혁에 전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제네바 아카데미
1555년 이후 칼뱅이 제네바 시의회의 협력을 받으며 전적으로 힘썼던 사역은 바로 교육과 선교였습니다. 이 모두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기관이 제네바 아카데미였는데요. 이미 교회법령(1541)에서 칼뱅은 “우리 자녀들에게 교회가 황무지 같은 곳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해 준비해야 하며, 자녀들이 목회직과 시민 정부에서 일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위하여 우리가 학교를 설립해야만 한다”고 역설했습니다(임종구, 211). 1559년 제네바 아카데미가 개원하게 되고, 초대 학장으로 칼뱅의 동역자요 후계자인 데오도르 베자가 임명되었습니다. 유럽 전역에서 학생들이 몰려오면서 학교는 성공적으로 운영되었고, 이들 중 대다수가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제네바 아카데미, 2017>
중세에도 신학을 공부하는 대학은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네바 아카데미를 비롯하여 종교개혁자들이 세운 신학교들은 중세의 대학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는데요, 신학교의 주된 목적을 목회자 양성에 두었던 것입니다. 후스토 곤잘레스(the history of theological education, chap. 10)에 따르면 중세의 신학교는 성직자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성직자가 된 후에 진리를 탐구하고 싶은 사람들이 신학을 공부하는 곳이었습니다. 신학교의 주된 목표는 목회자 양성이 아니라 진리 탐구였던 것이지요. 이는 신학의 목표와 교회의 삶이 분리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칼뱅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정식으로 신학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이를 위해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웠습니다. 이로써 더이상 신학은 교회와 분리된 채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위한 신학이 시작된 것입니다.
<제네바 아카데미 학생들을 격려하는 칼뱅>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강의하는 칼뱅>
제네바 아카데미의 중요한 역할이 선교에 있었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1555년 이후, 그러니까 칼뱅이 마음껏 사역할 수 있게 된 이후에 칼뱅이 가장 전념하였던 것은 선교였습니다. 1555-56년 사이에 제네바에서 약 300여명의 목회자를 프랑스로 파송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시의회에도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파송하였지만,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었지요. 칼뱅은 시의회에 추가로 목회자를 파송할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고 요청하였고, 시의회는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밀리에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시의회와 상관없이 진행하는 것에 동의하였습니다.
제네바 시의회의 염려대로 실제로 1561년 1월에 프랑스의 샤를 9세는 특사를 보내서 최근 프랑스에서 발생한 소요들이 제네바에서 보낸 설교자들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며, 그들을 다시 제네바로 불러들이고 다시는 보내지 말라고 경고하였지요. 물론 제네바는 우리는 그런 적이 없다고 답변하였습니다(맥그래스, 318). 그 일은 시의회와 상관없이 교회에서 한 일이었으니까요. 이런 이유에서 제네바는 프랑스로 보낸 목회자에 대하여 공식적인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나중에 프랑스로 파송된 목회자들이 제네바로 보낸 편지들을 재구성함으로 그 수가 매우 많았음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1555년까지 프랑스에는 5개의 개신교 지하교회들이 있었는데, 1559년에는 그 수가 백여 개로 급증하고, 학자들에 의하면 1562년에 이르면 프랑스 전역에 약 2,150개 이상의 개신교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당시 프랑스 교회에서 칼뱅에게 온 편지들은 프랑스 전역에서 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 가톨릭 사제는, 모든 도시에서 제네바로부터 온 목회자들이 설교한다고 말하며, 주님께서 이 나라를 포기하신 것 같다고 한탄하기도 하였습니다.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목회자 양성이 더욱 중요한 과제가 되었고, 1559년 6월 5일 제네바 아카데미가 개원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고 프랑스로 파송된 선교사들의 평균 수명이 6개월 정도였다고 합니다. 6개월 안에 잡혀서 화형을 당했던 것입니다.
칼뱅하면 많은 사람들이 예정론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들을 미리 정하셨다면 굳이 전도하고 선교하지 않아도 되겠네?’라고 쉽게 단정하듯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예정론을 확신하고 가르쳤던 칼뱅이 그누구보다 전도와 선교에 열심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칼뱅이 기독교강요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우리는 누가 예정된 수에 속해 있고 또 누가 속하지 않았는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열망해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우리가 가진] 평화에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고통, 죽음, 무덤
1541년 칼뱅은 이미 끔찍한 편두통, 심각한 위장 장애를 앓고 있었습니다. 1555년 칼뱅의 건강 상태는 더욱 나빠졌습니다. 칼뱅의 매일 감당해야 헀던 수많은 사역들을 생각할 때,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편두통과 위장 장애 뿐만 아니라 통풍에도 시달렸고, 요로 결석으로 큰 고통을 호소했으며 폐결핵으로 기침을 할 때 피를 토하기도 하였습니다. 식사는 소량으로 하루에 한 끼를 겨우 먹었고, 자주 금식했습니다. 1558년 10월에 나타난 열병은 1559년 5월까지 지속되었고, 주변 사람들이 생명을 염려할 만큼 심각했습니다.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라고 할 만 하지요. 1563년 칼뱅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습니다. 공적 업무를 삼갔지만 집으로 찾아오는 열정적인 방문객들을 상담하고, 구술로 글을 쓰는 일은 계속되었습니다. 베자는 칼뱅의 지치지 않는 구술로 인해 그의 비서들이 지치게 되었다고 말하였는데요. 마지막까지 칼뱅은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소명을 다하였습니다.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가는 칼뱅>
거의 평생을 끔찍한 질병의 고통 가운데 보냈던 칼뱅은 질병을 어떻게 생각하였을까요? 마담 드 콜리니가 병에서 회복되었을 때 칼뱅은 축하의 편지를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습니다. “병을 통해 연약함이 드러날 때 겸손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을 잘 살펴서 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비 안에서 위안을 찾아야 합니다. 또한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불필요한 것을 태워버릴 수 있는 치료약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이런 병은 하나님이 원하실 때 언제든지 주님께로 갈 준비를 하라고 가르치는 죽음의 메시지임을 깨달아야 합니다”(셀더하위스, 280). 셀더하위스는 칼뱅의 이런 태도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살면서 “왜?”라는 질문을 “무슨 목적으로?”라고 바꾸려고 한 개혁교회 목사들의 전형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1564년은 그(칼뱅)에게 영원한 행복의 시작이었으나, 우리에게는 지극히 길고 큰 고통의 시작이었다”(베자, 96). 1564년 4월 2일 부활절, 칼뱅은 마지막으로 가마에 실려 교회로 와서 누워서 설교를 듣고, 성찬을 받고, 떨리는 목소리로 찬송을 불렀습니다. 죽어가는 얼굴에는 기쁨의 표지가 명백히 드러났다고 합니다. 4월 25일 그는 구두로 유언을 작성하였고, 이후 마지막으로 시의원들과 목회자들에게 집으로 와달라고 부탁하여 각각에게 고별사를 전합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그들의 호의와 협력에 감사하였습니다. 5월 2일 칼뱅은 80세의 병든 노인인 파렐이 병문안을 오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당신이 나 때문에 피곤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편지합니다. 파렐은 기어이 칼뱅을 만나고 돌아갔습니다. 다음해 파렐도 죽음을 맞게 됩니다. 5월 19일 칼뱅은 목회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고, 5월 27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시의회 회의록은 “오늘 저녁 8시 책임감이 강한 칼뱅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감각과 정신이 온전한 채로 하나님께 갔다”라고 이 개혁자의 퇴장을 적고 있습니다(임종구, 145).
<칼뱅의 임종>
칼뱅의 지시에 따라 칼뱅의 장례는 다른 시민들과 동일하게 교회법에 따라 간소하게 치러졌습니다. 8시경 그의 시신에 흰 수의가 입혀지고, 장식이 없는 소나무관에 눕혀졌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라는 그의 유언을 따라 화려한 행렬도 없이, 의식이나 조사도 없이, 묘비나 비문도 없이 쁠랭 빨레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습니다. 황량한 벌판에 무덤을 표시하기 위해 한 그루의 작은 나무를 심었을 뿐입니다. 칼뱅은 그의 고백대로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최후의 순간에도 그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영광보다 인간 칼뱅을 더 귀하게 생각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1535년 출판된 올리베탕 성경의 서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안상혁 교수님이 ‘거절된 땅에서 발견한 하나님’이라는 제목을 붙여 소개해주셨는데요. 칼뱅이 어떤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왔는지 잘 보여줍니다.
“추방? 우리가 한 나라에서 추방을 당한다 해도 이 세상이 전부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안다. 설사 세상에서 아예 쫓겨난다고 해도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안다. 가난? 우리가 헐벗고 가난해질 때도, 우리에겐 우리를 먹이시기에 충분히 풍부하신 한 아버지가 계심을 안다. 고통?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통해 이것이 영광에 이르는 길임을 안다. 죽음? 죽음이 우리가 마땅히 바라는 생명을 우리에게서 빼앗지 못함을 안다. 박해의 현실? 우리 눈앞에 하나님의 참된 종들이 죽어 없어져 가는 것을 볼 때, 마치 모든 소망이 사라지는 것처럼 슬퍼하지 말자. 왜냐하면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라고 한 터툴리안의 말은 진실로 그러하며, 언제나 그렇게 체험되었고, 끝까지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칼뱅이 제네바로 올 때 “나의 심장을 주님, 당신께 드립니다. 즉시 그리고 진심으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칼뱅은 이 고백대로 제네바에서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심장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소명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즉시 그리고 진심으로 드려야 할 심장은 무엇입니까?
것과 관련이 있는데요. 인구가 급증한 주된 이유는 제네바로 피신한 프로테스탄트 망명객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난민의 대부분은 프랑스 출신이었는데, 전문 기술자들이 많았고 부유하고 교육수준과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이들은 칼뱅을 열렬히 지지했습니다. 문제는 이들에게는 투표할 권한을 가질 수 있는 시민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난민들은 공직에 나설 수 있는 피선거권이 없는 2등 시민권(부르주아)을 얻을 수 있었는데, 충분한 재산과 사회적 명성이 있는 사람들은 이 시민권을 살 수도 있었습니다. 1554년까지는 시민권 승인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1555년 제네바 시의회는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자격을 갖춘 자들에게 시민권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되고, 이때 칼뱅을 지지하는 많은 난민들이 시민권을 얻어 선거권을 갖게 됩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은 시의회는 이들의 투표권을 차단하려 했지만 실패하였고, 결국 시의회는 칼뱅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채워지게 됩니다. 비로소 칼뱅은 평화롭게 교회 개혁을 실행해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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