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 욥기
읽을말씀
“제가 주께 대하여 귀로만 들었으나 이제는 저의 눈이 주님을 뵙습니다”(욥기 42장 5절).
본문은 “욥기”입니다. 욥기의 저자는 알지 못하지만, 시기적으로 “족장시대”를 이야기의 배경으로 두고 있다고 봅니다. 욥은 “우스”라는 땅에 살았는데, 그는 “흠이 없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혜롭고 부유했으며,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욥에게 엄청난 고난과 시련이 닥칩니다. 시작은 하나님께 대한 사탄의 도전이었습니다. “욥에게 모든 복이 거두어지고 고난이 닥쳐도, 여전히 그가 하나님을 경외할까요?” 하나님은 이와 같은 사탄의 도전을 허락하십니다.
그 결과, 욥은 가축과 종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아들을 한꺼번에 잃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탄이 욥의 몸까지 쳐서, 그는 온몸이 종기로 고통 받게 됩니다. 욥의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며 그를 조롱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1:22), 입술로도 범죄하지 않았습니다(2:10), 이와 같은 욥의 모습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보여 줍니다.
그렇지만, 욥에게 닥친 엄청난 고난과 시련은 분명 그를 괴롭게 하였습니다. 비록 하나님을 욕하고 저주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욥에게 세 친구(엘리바스, 빌닷, 소발)가 찾아와 그와 변론하게 됩니다. 세 친구는 동일하게 인과응보 사상을 말했습니다. 곧,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고난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욥의 대답은 동일합니다.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고난은 하나님의 형벌이 아니며, 심지어 욥은 만약 하나님이 무죄한 자에게 고난을 주시는 분이라면, 그것은 공의롭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욥은 엄청난 혼란 속에서 하나님께 직접 이 고난의 원인을 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욥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욥(의인)이 고난 받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고 그것을 다스리시는 분이 누구인지 알려 주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욥이 가진 지식으로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욥에게는 세상을 다스릴 만한 아무런 지혜와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하나님의 공의를 재단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불의하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욥은 비로소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본질”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난의 핵심이 (“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 티끌과 재 위에서 회개합니다”(42:6). 이것은 욥이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회개한다”(니함)는 것은 “생각을 바꾼다.”, “뜻을 돌이킨다.”는 의미입니다. 욥이 알게 된 사실을 무엇일까요? 욥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무가치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어떠한 요구에도 대답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입니다. 욥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에 압도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인가?
공의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공의란 의로운 자들과 악한 자들을 구별하여,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마땅한 바를 보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 삶을 돌아보면 세상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적용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의롭고 경건한 자가 의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억울한 판단을 받으며, 오해를 받고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욥의 세 친구와 같이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다. 그러니 만약 고난을 당한다면, 그것은 고난당하는 자의 죄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너무나 단순화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알지 못하는 무지함일 뿐입니다. 욥 역시 계속해서 자신이 겪는 고난에 대하여 끊임없이 하나님께 질문하였습니다. 욥기가 끝날 때까지,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은 욥이 고난 받은 이유를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욥기는 “하나님의 주권”을 말씀합니다. 곧,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스리시는 주권자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나에게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곧 지혜이고,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인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셨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항상” 옳으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우리의 “상황”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곧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많은 의의 경건한 자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의로운 가지가 되시며, 가장 공의로우신 “메시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구원자가 오실 때, 하나님께서 고난 당하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의를 밝히 나타내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실제 역사 속에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욥은 존재론적으로는 죄인이었지만) 예수님은 존재론적으로도 완전한 의인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온갖 고난과 핍박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심으로써, 참된 왕이자 참된 사명자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소망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비록 지금 우리의 상황이 곤핍하고, 때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고난을 당하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이 바뀌는 날이 반드시 옵니다. 그날에, 하나님은 의로운 자의 의를 인정하고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모양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항상 가장 선하고 지혜로우시며 의로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기 바랍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불평 없이 늘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욥의 소리를 듣고 계셨습니다. (비록 욥이 그의 무지함 가운데 하나님을 판단하기도 했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욥의 모든 부르짖음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옳았고, 그의 친구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베푸셔서, 욥의 모든 것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으며, 우리는 의가 되시며 지혜이신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상황과 문제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주변에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쉽게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가운데, 이웃을 위로하며, 그들을 위해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모든 모양을 통하여, 세상을 다스리시며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을 만나고 인정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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