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 누가복음 10장 25~37절
읽을말씀
“그가 말하기를 ‘그를 긍휼히 여긴 자입니다.’ 하니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여라”(누가복음 10장 37절).
본문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관한 말씀입니다. 동일한 내용이 마태복음 22장, 마가복음 12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핵심이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가?”라면, 누가복음에서 율법학자는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하여 질문합니다. 나아가 누가는 이웃과의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로 접근하는데,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이웃을 사랑하며 그들을 선대한다는 것입니다.
“행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이에 예수님은 그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되물으셨습니다. 그것은 곧, 나의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쏟아 부어” 하나님을 사랑하고(신 6:5), 그와 “동일하게” 이웃에 대하여 헌신하는 것입니다. 율법학자의 대답을 따라, 예수님은 그에게 하나님과 그의 이웃에게 아무 조건 없는 사랑을 계속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이번에 율법학자는 자신의 의로움을 보이려고 다시 질문합니다. “제 이웃이 누구입니까?” 율법학자는 자신이 도울만한 이웃의 범주(자신과 같은 유대인 등)를 정해 두고, 자신이 영생을 얻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강도 만난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사람(아마도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를 만납니다. 그는 온몸이 두들겨 맞고 옷까지 벗겨진 채 길에 버려져, 의식도 없이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았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제사장은 엘리트 계급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부유했기 때문에 아마도 그는 탈 것을 타고 내려가던 중일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그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의 죽을 지경이 된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갔습니다”. 뒤이어, 한 레위인도 그곳을 지나갔습니다. 레위인은 제사장의 보조자 역할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역시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고,” 그를 피해 “지나갔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의식법상 정결의무를 지켜야 할 자신들의 위치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 의무를 지키기 위해 무모한 일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때, 한 사마리아인이 나타납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이 가장 멸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어가는 사람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그의 도움은 아주 구체적이었습니다.
1) 먼저,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의 상처를 싸맸습니다. (아마도 기름으로 상처를 씻어내고, 포도주로 상처 부위를 소독했을 것입니다.) 2) 그리고 그를 자기가 타고 다니던 짐승 위에 태웠습니다. (때문에 사마리아인 자신을 걸어서 마을까지 가야 했을 것입니다.) 3) 그렇게 사마리아인은 그를 여관으로 데려가 그날 밤 그의 곁에서 머물렀습니다. 4) 다음 날, 그는 여관을 떠나면서 주인에게 여관비를 지불했습니다. (당시에는 여관비를 내지 못하면, 주인에 의해 노예로 팔릴 위험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추가로 드는 비용에 대하여는, 자신이 돌아올 때 지불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그는 말하기를 “그를 긍휼히 여긴 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여라.”
[생각하기]
1)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이 보여 준 모범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의 핵심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대로 행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 이것은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흔들림 없이 사랑하고, 그와 같은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등장했던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들은 레위기 21장에 등장하는 정결의무를 지키는 것이 죽어가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보편적인 생각으로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대인들 역시 그들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사장과 레위인의 행동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정당화될 수 없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보여 준 행동, 곧 정결의무의 절대성으로도 결코, 죽어가는 이웃을 외면한 죄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때, 사마리아 사람이 등장합니다. 아마도 비유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사마리아인 역시 그냥 지나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이 그토록 미워하고 멸시하던 그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돌보아주었습니다.
2) 이웃 사랑의 모범
이때 우리는 사마리아인이 보여 준 행동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것(기름, 포도주, 천으로 싸매기, 짐승에 태우기, 시간, 에너지와 돈)을 사용하여 강도 만난 사람을 보살폈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들로 심한 상처를 싸매어 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마을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그의 곁에 머무르며 돌보아 주었습니다. 심지어, 사마리아인은 사용한 여관비뿐만 아니라, 이후에 필요한 비용까지 모두 책임졌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 세상을 섬긴다는 것은 단지 어떤 감정을 품거나 표면적으로 돕는 어떠한 행위가 아닙니다. 섬김에는 ‘구체적인 행동’이 수반됩니다. 나의 시간을 사용해야 해고, 때로는 금전적인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삶의 모습을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예수 제자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3) 나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율법학자와 같은 질문을 할지 모릅니다. “나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율법학자는 “이웃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멸시받는 이방인과 사마리아인 같은 사람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리어 “내가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 물으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고민은 나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판가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으로 변화되었다면, 그것이 삶의 열매로 나타나는가?” 하는 데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도움을 베푸는 삶의 대상은 제한될 수 없습니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우리는 그들을 기꺼이 도와줄 수 있는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 공동체는 물론, 삶의 공동체를 모두 사랑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이미 영생을 은혜의 선물로써 거저 받았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면, 그 지식은 반드시 우리의 삶 속에서 해석되고, 구체적으로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이,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해 이웃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흔들림 없이 사랑하시니, 우리 역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여, 이웃을 섬기는 데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아끼지 않고, 조건 없이 사랑을 베풀며, 그들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의 제자로서 세상을 섬기는 가운데, 우리의 자녀 또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들로 자라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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