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 3:7-18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은 평범한 과거 역사의 사건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역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들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는 특별계시로서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 가운데에서, 특별히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에서 일어난 계시 사건들을 성경으로 기록해주셔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룻기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도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의 영광에 관하여 알게 하시기 위하여 특별한 섭리로 있게 하신 계시 사건입니다.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으소서(7-9절)
룻은 괴롭고 곤고한 형편 가운데 있었습니다. 룻은 베들레헴 땅에서 가난하고 외로운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룻의 비참한 형편은 모든 인생들의 비참을 대표합니다. 하지만 룻에게는 한 가지 희망이 남아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속자(고엘) 제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서 구속자 제도를 세워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 누구든지 자기의 힘으로 가난과 비참에서 자신을 건질 수 없을 때, 구속자에게 나아가서 가난과 비참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룻은 나오미를 통해서 이스라엘에 이러한 구속자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보아스가 자신들의 기업 무를 자(구속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룻은 약속의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자기의 구속자를 찾아 보아스에게 나아갔습니다.
룻은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서 보아스의 타작마당에 가서 보아스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에 가만히 누웠습니다(7절). 잠을 자던 보아스는 자신의 발치 이불 아래로 들어온 여인을 향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8절). 그 때 룻은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9절)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룻은 자기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비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구속할 수 있는 구속자를 찾아 나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금생과 내세에서 당하게 되는 모든 비참과 곤란과 가난의 문제를 결코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하나도 없습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한 마디로 죄와 비참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해 오게 된 금생과 내세에서의 비참과 고통과 사망의 문제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때 우리는 어디로 피해야 합니까? 누구의 날개 아래, 누구의 그늘 아래로 피해야 합니까?
룻은 구속자 보아스의 날개 아래로 피했습니다.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9절)라고 했을 때, “옷자락”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카나프”로 본래 “날개(wing)”라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룻은(룻 2:12) 또한 구속자 보아스의 날개 아래로 피하였습니다. 구속자 제도가 있다는 것은 룻에게 복음이었고, 보아스와 같은 구속자가 예비되어 있었다는 것도 복음이었습니다. 룻은 그 복음을 믿음으로 구속자에게 나아갔습니다.
내가 구속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10-15절)
보아스는 참된 믿음을 가지고 겸손하고 간절하게 구속을 바라며 나아온 룻을 영접해 주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구속을 약속하였습니다(13절). 보아스는 의롭고 순결한 구속자였습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잠자리로 들어온 젊은 여인 룻을 대할 때에 일절 깨끗함으로 상대했습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날개 아래에서 룻에게 쉼을 주었습니다(13-14절). 그리고 보아스는 동이 트기 전에 룻을 집으로 돌려보냄으로써 룻의 명예를 지켜주었습니다(14절).
또한 보아스는 자비로운 구속자였습니다. 보아스는 자기의 옷자락 아래 피하러 온 룻을 축복하면서 룻의 믿음을 북돋아주었습니다(10절). 보아스는 룻에게 추수한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고서 그것을 가지고 돌아가게 하였습니다(15절). 이는 보아스가 나오미와 룻의 가정을 구속하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호의의 행동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구속하기 위하여 큰 희생을 치러야 했지만, 보아스는 기꺼이 룻의 구속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신중했습니다. 보아스는 분명히 룻을 아내로 맞이할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룻에게 자기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한 사람 남아있음을 알고 그 사람의 의견을 확인할 때까지 아무 것도 확정짓지 않았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구속하는 일은 선한 일이었지만 보아스는 그 과정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명하신 방법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했습니다.
내 딸아 가만히 앉아있으라(16-18절)
집으로 돌아온 룻은 보아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나오미에게 다 말해 주었습니다(16절). 자초지종을 들은 나오미는 룻에게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18절)고 하였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말은 “기다리라, 잠잠하라”는 말입니다. 나오미의 이 말은 룻에게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말입니다.
룻은 이미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가만히 기다려야 할 때였습니다. 룻은 모든 상황을 자신이 통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결과를 맡겼습니다. 보아스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구속하기를 원했고 룻과 결혼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내가 결혼을 결심했으니 이제 나는 절대로 룻을 빼앗길 수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룻을 구속하는 일은 선한 일이었고 보아스는 그 일을 진정으로 원했지만, 보아스는 하나님께서 그 선행을 정말로 자신에게 허락해 주시는지를 확인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에 비추어볼 때, 룻을 구속할 수 있는 더 가까운 친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12-13절). 보아스는 최종적인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처분을 받아들이고자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신앙적 태도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룻에게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초조한 마음이 되어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려고 하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마음 졸일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선하신 섭리로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 종종 우리로 하여금 인내하게 하십니다. 그 때에는 잠잠히, 가만히,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최선을 다하여 하되, 그 모든 일의 결과에 대해서는 선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면 됩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구속자 제도를 아무 뜻 없이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속자라고 하는 개념을 가르쳐서 우리의 진정한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에게 피하게 하시기 위하여 구속자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속자 제도를 통해서 모든 죄인들이 구속자를 통하여 죄의 문제와 비참의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할 것을 미리 예습시켜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룻처럼 가난하고 곤고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죄와 비참의 문제는 없습니까? 우리에게는 구속자가 필요 없습니까? 여기 복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구속자가 있다는 소식입니다. 우리의 구속자이신 그리스도는 보아스와 비교할 수 없이 무한히 선하시고 자비하며 완전히 의롭고 순결하신, 참으로 유력한 구속자이십니다. 그리스도께 나아와 이렇게 아뢰십시오. “그리스도시여, 주님의 옷자락으로 이 죄인을 덮어주십시오. 주의 날개로 나를 품어주시고 나를 보호하여 주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늘 아래에서 이 죄인이 쉬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흉악한 죄와 모든 비참에서 나를 건져 주시옵소서.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리스도께 여러분의 모든 죄와 비참의 문제를 맡기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십자가 그늘 아래에서 모두 쉼을 얻으십시오. 구속자의 날개 아래에서만 참된 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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