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8-17
504년 전 오늘, 1517년 10월 31일은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궁성(宮城) 교회의 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게시한 날입니다. 개혁교회는 이 날을 종교개혁 기념일로 삼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그늘 아래 있는 우리는 개혁교회의 성도들로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일으켜 주셨던 종교개혁자들의 노고와 그들의 신앙적 유산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한 마디로 “복음의 재발견”입니다. 교회의 성패는 복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태도가 어떠한가 하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교회는 바로 설 수 있고 우리가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일어나서 교회가 잃어버린 복음의 진수를 재발견하고 그 복음의 깃발을 높이 들어올렸을 때에 교회는 갱신되고 복음의 능력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종교개혁자들은 로마서에서 복음의 진수를 발견하였습니다. 칼빈은 “우리가 이 서신(로마서)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면 성경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모든 보화들을 찾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게 되기까지에도 로마서가 있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8-15절)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로마에 가기를 원한다 하였습니다. 바울이 그토록 간절하게 로마에 가려고 했던 것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로마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따라서 로마 교회는 선교전략상 매우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해서 그들을 견고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로마에 가서 그곳의 성도들을 만나서 자기가 받은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어 그들을 견고하게 세워주고 또 피차 위로와 권면을 받으면서 복음의 열매를 맺고 싶어했습니다(8-13절).
바울이 그토록 로마에 가고자 했던 것은 그에게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 모두에게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4절). 이는 그가 하나님께 받은 이방인 선교의 사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바울은 특별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았기에 로마에도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15절). 그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부채감이었습니다. 누군가 먼저 복음을 듣게 하신 것은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16절)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16절)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구현된 것이 복음”입니다(존 머리).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 것은 복음을 들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구원하실 때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도구입니다(고전 1:21; 벧전 1:23,25 참조).
바울이 전하기를 원했던 “그 복음”은 한 마디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는 선언입니다. 복음이란 “사시고 참되신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 것과, 인간이 죄와 비참한 형편 아래 있는 것과, 구원자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죽음이라는 것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우리는 순전히 은혜로 구원을 얻으며 금생과 내세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에 모든 것이 다 담겨 있습니다. 복음에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복음은 말과 글일 뿐입니다. 하지만 말과 글로 된 복음이 우리 가운데 선포될 때에, 하나님께서 그 복음의 선포를 능력 있게 사용하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하게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의를 값없이 힘입도록 하십니다. 이 복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 차별이 없습니다(16절). 복음은 유대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믿는 자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17절)
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어 있습니다(17절). 복음은 죄인이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 구원 얻는 길을 알려줍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의미합니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의는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으로서 의롭다는 의미에서의 의가 아니라 복음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다는 의미에서의 의이다. 이것은 행위들로부터 오는 사람의 의와 구별하여 하나님의 의라 불린다.” 칼빈도 이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의라고 하였고, 조나단 에드워즈 역시 “하나님의 의는... 사람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의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죄인된 우리에게는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하나님의 의를 힘입고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 외에는 구원의 다른 소망이 없습니다. 그 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며, 그 의는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복음에 나타난 이 하나님의 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어거스틴이나 루터는 이 구절을 해석할 때 하나님의 의가 신자의 믿음을 점점 더 자라게 하는 것으로, 또는 고백하는 믿음에서 순종하는 믿음으로 이르게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였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믿음에(from faith to faith)”라는 말은 “오직, 철저하게 믿음으로만”이라는 숙어적인 표현으로 이해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존 머리).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는 오직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만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의는 발견될 수 없고 믿음으로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의를 힘입을 수 없습니다.
복음에 나타난 이 하나님의 의가 아니면 인간에게는 구원의 소망이 없습니다.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오직 은혜로,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가야 한다는 복음의 진수를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확실하게 전수하고 싶었습니다.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오고 오는 세대의 교회들이 그 복음 위에 굳게 서게 되기를 열망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개혁자들이 가졌던 열망이기도 했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만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롬 1:18).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는 자리로 나아오십시오. 그리고 복음에 대한 확신과 열정을 회복하십시오. 우리는 복음으로만 하나님의 의를 힘입을 수 있으며 구원을 얻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지고 기회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하십시오. 이것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숙제입니다. 이러한 부채감이 없다면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만을 위한 삶으로 빠져들고 말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빚진 자의 심정으로 위대한 종교개혁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 사도적 복음이 이 땅에서, 우리 교회의 강단에서 변함없이 선포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과 함께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죽은 자가 살아나고 죄인이 구원을 얻는 놀라운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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