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2:17-29
바울은 로마서 2장 전반부에서, 율법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논증했습니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사람이며, 하나님은 죄를 지은 죄인을 심판하시고 형벌하시는 분입니다. 이 기준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아무리 율법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이라도 죄를 지으면 그 사람은 죄인입니다. 이방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그들에게는 기록된 율법은 없지만, 그들에게는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그들에게 율법이 되며, 따라서 그들이 그 지식을 거슬러 죄를 지었다면 그들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롬 2:12-16).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는 유대인들(17-20절)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말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언제나 자신들을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고 여전히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생각하면서 복음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유대인들을 향해서 말합니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17절). 헬라어 원문의 17절은 “그러나 만일” 또는 “그런데 만일”이라는 말(‘에이 데’)로 시작됩니다. “만일”로 시작되는 이 조건절은 20절까지 길게 이어집니다.
우선 그들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호칭은 매우 영광스러운 호칭이었습니다. 이 호칭은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끝까지 간직하고 있던 유다 왕국의 후손들이요 언약 백성임을 의미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참되고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17절).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담지자로서 언약의 표인 할례를 자신들의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율법을 의지했습니다(17절).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무한한 자긍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교훈에 능통했고, 하나님의 뜻을 지식적으로 잘 알고 있었으며,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18절). 하지만 바울은 그들이 진리의 “규모”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19절). “규모”라는 말은 “외형, 겉모양”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딤후 3:5 참조). 유대인들의 모습은 “겉모양”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 단어가 “허풍”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는 맹인들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고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다.”라고 스스로 자신들을 평가했습니다(19-20절).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21-24절)
바울은 이제 유대인들의 그러한 생각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를 따져봅니다. 바울은 긴 조건절을 끝내고 “그러면”이라는 말로 결과절을 시작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향해 그들의 실상, 그들의 내면의 실체를 똑바로 직시하게 만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폭풍 같은 질문들을 던집니다. 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21절). 2)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21절). 3) “간음하지 말라 하는 네가 간음하느냐?”(22절). 4)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22절). 5)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23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찍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런 위선과 도적질과 간음과 우상숭배의 문제로 인해 하나님의 책망을 자주 들었습니다(시 50:16-20, 사 1:11,23, 29:13 등). 이 신랄한 질문들을 통해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한 마디로, “유대인, 너희들이 정말로 의로우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히려 그들이 한편으로는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율법을 범함으로써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23절). 바울은 에스겔 36:20-21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유다 나라가 하나님의 법을 계속 어기고 온갖 우상을 섬기고 음행을 저지르고 살인과 강포로 그 땅을 뒤덮는 일을 반복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징계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와 조롱과 모욕을 당했던 것을 상기시켰습니다(24절). 그것이 유대인들이 직시해야 할 자신들의 영적 형편이었습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참 유대인이며(25-29절)
그들이 아무리 혈통상으로 유대인이고 율법에 능통하고 할례를 받은 언약 백성이라고 하더라도 율법을 범하는 삶을 산다면 할례는 아무 유익이 없었습니다(25절). 율법이란 그것을 행할 때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가지고만 있다고 해서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로 알고 믿는 믿음과 함께 할례를 간직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약속을 받았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 채, 그 약속의 표(mark)와 인(sign)인 할례만을 자랑하고 그것으로 안심하고 만족하면서 구원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참된 믿음은 없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도 없으면서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로만 만족해하면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한다면 이 얼마나 헛된 일입니까?
반면에 육체로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구약성경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을 믿고 섬기게 되어 율법을 따라 순종의 삶을 산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무할례자라고 하더라도 할례자와 실질적으로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26절). 그렇게 된다면 그가 아무리 무할례자라고 하더라도 율법과 할례 둘 다를 가지고 있으면서 율법을 범하는 유대인들을 판단하게 될 것입니다(27절).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겉모양이 유대인이라고 해서 참 유대인이 아니고, 표면적으로 육체에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참 할례자가 아니며, 오히려 그 이면이 유대인이어야 참 언약 백성으로서의 유대인이며, 율법의 조문을 따라서 받는 할례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라고 하였습니다. 칭찬과 명성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어야 합니다(28-29절).
이 말씀은 모든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외면적으로 볼 때에는 더 없이 훌륭하고 칭찬 받는 그리스도인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아는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면(내면)은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면서 정작 우리 자신은 가르치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자랑거리로 삼으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거리가 되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리의 모양은 가지고 있으면서 진리의 능력은 부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진짜 그리스도인입니까? 아니면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입니까? 우리의 신앙에는 거품은 없습니까? 무엇이 우리의 실상입니까? 우리의 칭찬은 사람에게서 오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의인이지만, 동시에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딤전 1:15).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자신은 의인이기만 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한없이 교만하게 되고 한없이 위선적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다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표면과 이면의 구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장과 폐부를 살피시는 분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인정합시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받는 칭찬과 인정들은 다 공허하고 허무한 허상입니다. 모든 허상을 내려놓고, 이 가련한 인생들이 어디로 나아가야 할 것인지, 복음에서 그 길을 찾읍시다. 표면으로 만족하고 안심하지 말고 우리의 내면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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