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5:1-5
로마서 5장은 새로운 단락의 시작입니다. 이제까지 바울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과(1:18-3:20), 그러한 죄인이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지(이신칭의 교리)에 관하여 논하였습니다(3:21-4:25). 로마서 5장은 로마서의 본론의 세 번째 단락(5-8장)의 시작입니다. 바울은 이 단락을 “그러므로”(1절)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바울이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에 논리적으로 이어서 말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단락에서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에게 일어나는 일들, 곧 칭의의 결과로 믿는 자들에게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들에 대해 논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린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어떤 일이 생깁니까? 첫째,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평화)을 누리게 됩니다(1절). 이것이 구원 얻은 신자가 경험하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이 평화는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데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칼빈은 이 평화를 가리켜 “믿음에서 난 의의 특별한 열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인생은 그 마음에 참된 평화가 없습니다(사 57:21). 지금 당장 아무리 건강하고 성공한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과의 화목과 화평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 상태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심령에는 참된 평화가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기 전까지는 언제나 두려움과 불안에 싸여 살아갈 뿐,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이 화평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것입니다(1절).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에 대해서 분노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인생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서 평화(peace)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고(사 9:6), 우리의 화평이십니다(엡 2:14).
이 평화는 특별히 우리 양심의 평안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화목은 우리의 양심을 평안하게 만들어 줍니다. 칼빈은 “이 화평이라는 말은 양심의 평온을 의미하며, 이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음을 알아차리는 데서 생긴다”(로마서 주석)고 말했습니다. 이 평화는 마치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의 품에 안겨 아버지와 화해하고 아버지의 집에 거하게 된 데에서 오게 된 안도감이나 평안함과 같은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멀리 떠나 온갖 비참과 가난 가운데에서 살다가 회개하고 아버지께 돌아와서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누리기 시작하고 아버지의 집에 거하게 되면, 그 마음에 무한한 안도감과 함께 평화가 샘처럼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평화가 바로 이런 평화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에 들어갔고 그 은혜 가운데 서 있다
둘째,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는 은혜에 들어가서 그 은혜 위에 서게 됩니다(2절). 이 은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으로서 가지는 일체의 특권과 복락을 의미합니다. “은혜에 들어갔다”는 말은, 구원 받은 자의 복된 상태에 들어가게 된 것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만이 이 은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만이 이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던 자들이었고, 이전에는 이 은혜를 알지도 못했고 받지도 못했고 누리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음으로 그 은혜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2절).
우리는 그 은혜에 들어갈 뿐 아니라 그 은혜 위에 서 있습니다(2절). 우리는 그 은혜, 그 복된 상태에 서 있는(완료시제) 자들입니다. “서 있다”는 동사는 “확실하게 서 있다, 흔들림 없이 굳세게 서 있다”는 의미의 동사(ἵστημι)입니다(엡 6:13; 골 4:12). 우리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서 있으며, 그 은혜 안에 서 있으며, 그 은혜 위에 서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한 마디로 “은혜에 들어가서 그 은혜에 서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은혜에 들어가서 그 은혜 위에 서 있는 우리는, 우리가 받아 누리고 있는 이 은혜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계속해서 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토마스 브룩스 목사님은, “어떤 사람이 은혜의 상태에 있다면... 자기 자신이 그런 은혜의 상태 가운데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알아야만 그 사람의 삶이 즐겁고 편안할 수 있습니다...은혜를 받는 것과 내가 받은 은혜를 스스로 아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지상에서 누리는 천국], 19-20쪽)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받는 것과 은혜를 아는 것은 다른 일이고, 은혜를 아는 것과 은혜를 누리는 것 역시 다른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한다
셋째,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장차 행하실 모든 일들에 드러나 있는 모든 아름다우심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도 없었고 바라지도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던”(롬 3:23) 자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을 피하고 멀리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히 1:3)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고,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게 될 것을 바라며(소망하며) 즐거워합니다.
이 소망은 너무나도 크고 확실해서, 우리는 심지어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환난과 고난은 분명히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환난 속에서도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환난은 인내를 낳는 수단”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환난 속에서도 인내를 이루고, 인내는 연단을 이루고, 연단은 소망을 이룰 수 있습니다(3-4절). 성도들의 소망은 결코 부끄럽게 되는 소망이 아닙니다(시 71:1, 119:116; 사 28:16 참조). 우리는 우리에게 넘치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이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넘치도록 부어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을 확신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5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8절).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믿는 자는 즐겁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가지고 있기에 즐겁습니다. 우리는 은혜에 들어가 은혜에 서 있으며 은혜의 돌보심을 받고 있음을 알기에 즐겁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지어 환난 중에서도 능히 견디며 즐거워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따라오는 이 놀라운 변화에 감사하며 이 기쁨으로 즐거워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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