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6:1-14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20에서 인간의 죄와 비참의 문제를 먼저 다루었고, 3:21-5장에서는 이신칭의 교리를 집중해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6-8장에서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곧 성화의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이신칭의 교리를 오해하고 남용하기 쉽습니다. 죄를 많이 지어도 회개하면 계속 죄 용서함을 받을 수 있으니 죄는 별것 아니고 이신칭의 교리는 참으로 편리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죄에 대한 느슨한 마음을 가지기도 쉽고,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고 하셨으니(롬 5:20) 죄를 더 많이 지어서 더욱 넘치는 은혜를 받자는 식으로 잘못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고 신앙생활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류의 생각들은 다 거짓되고 부패하고 삐뚤어진 마음에서부터 싹트는 것입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짓자고 말하는 것은 아주 그릇되고 사악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1절)라는 질문에 대해서 “그럴 수 없느니라”(2절)고 단언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자인지를 바로 알아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또한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2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을 도덕적인 차원에서 해석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죄를 짓지 않게 된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참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 도덕적인 면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해서 죄의 소욕이 완전히 죽어서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할 만큼 도덕적인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말씀을 도덕적 의미로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을 종말론적 차원에서 해석해서, 우리가 장차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어 영화로운 상태에 이를 것을 생각함으로써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지 각오를 새롭게 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지금 의롭다 하심을 받은 신자의 현재 형편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우리는 이것을 법정적인(forensic) 차원과 언약적인(covenantal) 차원과 영적(spiritual)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로 간주해 주십니다(갈 2:20). 그래서 우리는 사실 죄인이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선언되고 간주됩니다. 이것은 은혜 언약을 인해서 가능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 있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롬 5장). 먼저 우리는 모두 행위 언약으로 인해서, “출생에 의해서, 나면서부터” 아담과 연합한 자요 아담에게 속한 자로 태어납니다. 이것은 행위 언약의 작용입니다. 행위 언약 아래에서 우리는 모두 아담 안에 있고 아담과 함께 법정적으로 죄인이 되었고 또한 실제적으로도 그 죄의 오염과 영향을 받아서 실제로 죄를 짓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아담과 함께 죄인이 되었으며, 아담 안에 있었을 때에 우리의 삶의 특징은 죄와 비참과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더 이상 아담에게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단순한 육적 출생이 아니라 거듭남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그리스도와 “법정적으로, 언약적으로, 영적으로” 연합을 이루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은혜 언약의 작용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그렇다면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법정적으로, 언약적으로, 영적으로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는 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더 죄 가운데에 살고자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은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한편으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아서 천국에 가게 된 것으로 인하여 만족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적당히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것을 만족해하면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2절).
그리스도 예수와 믿음으로 연합한 우리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아 새 생명으로 살게 된 자들입니다(3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죗짐을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셨고, 우리에게 쏟아부으셔야 했던 모든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쏟아부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로 간주해 주십니다. 그리고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새 생명을 주셔서 그 새 생명으로 살도록 하십니다. 이 모든 일은 은혜 언약을 인해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절)라고 하신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말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담에게 속하여 살던 “나(I)”를 가리켜서 “옛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아담 안에 있던 “옛 사람(old man)”은 법정적으로, 언약적으로, 영적으로 죽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더 이상 아담에게 속한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새 사람(new man)”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렇게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으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12-13절).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을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려서 죄 짓는 삶을 살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새 생명을 가지고 새 사람으로 살아서 자신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자들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자들이 아니라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 안에 있는 옛 사람으로 살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니 더 이상 우리 자신을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가 되었으니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으니 그리스도의 것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을 가진 신자에게 어울리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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