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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병철 안

220717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난 우리

롬 7:1-6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그리스도인과 율법과의 관계를 집중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신자가 율법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복음을 오해하게 되고 신자의 성화에 대해 큰 오해와 혼란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이 주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고, 율법에 대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신자들이 더 이상 율법 아래에 있지 않으며(롬 6:14),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다고 선언하기도 하였습니다(롬 3:28). 심지어 바울은 율법을 대표하는 할례에 대해 말하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다”(갈 5:6, 6:15 참조)고까지 하였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마치 율법 전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율법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고 하였고(롬 7:12), 복음은 율법을 결코 폐하지 않고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도 하였습니다(롬 3:31). 그러다가도 바울은 또 다시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고 율법에서 벗어났다”(4,6절)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가져야 할지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야 할지 헷갈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법은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만 사람을 지배하고 구속한다(1-3절)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과 율법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보편적인 법의 원리를 가지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을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1절). 모든 법은 누군가 그 법을 어겼을 때에 그를 정죄하고 고소하고 형벌하는 법의 구속력을 가집니다. 하지만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에 대한 “법의 지배(구속력)”는 끝이 납니다.


바울은 “결혼”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이것을 설명했습니다. 한 여자가 한 남자와 결혼을 하면 그 여인은 자기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 결혼법에 의해 남편에게 매이게 됩니다. 그러다가 남편이 죽으면 그 아내는 남편에게서 자유하게 됩니다(2절).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 아내된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가면 그 여자는 간음한 여자로 여겨지겠지만, 남편이 죽었다면 그녀는 결혼법에서 해방되기 때문에 다른 남자에게 가도 간음한 여자가 되지 않습니다(3절).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어떤 법이든지 구속력을 가지는 것은 그 사람이 살아있을 때이지, 사람이 죽으면 그 법은 더 이상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 관계를 예로 들면서 “죽음을 통해서 법에서 자유하게 된다”는 개념을 소개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고 율법에서 해방되었다(4절)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율법과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이처럼)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4절).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는 말은, 신자들이 율법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그림처럼 잘 보여줍니다. 이전에 우리는 말하자면 율법과 결혼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율법은 신랑이었고 우리는 신부였습니다. 그런데 신부된 우리가 신랑된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입니다. 신랑인 율법이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기에 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마 5:17 참조). 따라서 율법과의 결혼 관계를 끝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신부된 우리가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부가 죽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다 살아있는데 신부가 언제 어떻게 죽었다는 말입니까?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4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가 받았어야 했던 율법의 모든 정죄와 저주를 친히 담당하시고 우리 대신 죽임 당하신 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는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믿음으로 우리 자신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로 여김을 받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율법과의 결혼 관계를 청산하고 율법에서 벗어났습니다(6절). 이제 자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을 대할 때에 먼저 율법주의적인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얽매었던 율법의 지배와 정죄에서 해방시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가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도록 율법에서 해방되었다(4절)

그렇다면 율법에서 해방된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가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곧바로 “이제 나는 율법에서 해방되었으니 이제 자유다! 내 마음대로 살자. 이제 율법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식의 생각을 가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러한 반율법주의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죽은 것은 율법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은 우리 마음대로 방탕하게 살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시기 위함입니다(4절).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우리를 연합시키심으로써 율법과의 결혼 관계를 끝맺게 하신 후에, 그리스도의 부활에 우리를 연합시키심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혼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거룩함의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거룩함의 열매를 맺는 것은 성령으로만 가능하다(5-6절)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위하여 거룩함의 열매를 맺는 삶, 곧 성화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이전에 이런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전에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속에서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습니다”(5절). “육신(사르크스, σάρξ)”이란 “죄의 통제와 지휘를 받는 인간 본성”(존 머리)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는 곧 “우리가 거듭나지 못하여 영적으로 무지하고 악하고 어두운 상태에 있을 때, 즉 우리가 죄의 종이었을 때, 옛 사람이었을 때, 율법 아래 있을 때”를 의미합니다. 그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속에서 역사해서 우리로 사망에게 열매를 가져다 줄 뿐이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라고 한 것은, 율법 때문에 우리에게 이전에 없던 죄의 정욕이 생겨났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던 죄의 정욕이 율법을 만난 후에 그 사악성을 더 현저하게 드러내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율법으로 말미암은 죄의 정욕은 우리 지체 속에서 역사해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율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6절). 그리하여 우리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성화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6절; 고후 3:6 참조). 신자는 성령의 새로운 것, 곧 새 마음과 새 성품과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하여 성화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겔 36:27 참조). 이제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와 결혼한 자들이 되었으니, 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에게 드리는 거룩의 열매를 풍성히 맺으며 살아가는 복된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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