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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4 문제는 율법이 아니라 죄입니다

작성자 사진: 병철 안병철 안

롬 7:7-13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이런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7절). 바울이 이런 질문을 던진 이유는, 앞선 로마서 7:1-6에서 바울이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고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했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율법을 나쁜 것으로, 율법이 죄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될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나쁜 것이고 율법은 죄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율법은 죄도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있는 진짜 문제인 죄를 드러내고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율법에 비추어 보면 우리의 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드러났다고 해서 율법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은 우리 안에 없던 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던 죄를 드러내서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건강 검진을 통해서 병을 찾아냈다고 해서 검진을 병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율법은 결코 죄가 아닙니다(7절).


오히려 율법은 고마운 것입니다. 율법이 없었다면 우리는 죄를 죄로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7절). 율법이 없었다면 우리는 “죄”의 개념조차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율법이 없었다면 우리는 “탐내지 말라”는 계명도 몰랐을 것이고, 탐심이 죄가 된다는 것도 몰랐을 것입니다. 율법이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죄가 있는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셔서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우리 안에 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결코 죄가 아니며, 오히려 율법은 고마운 것이고 거룩한 것이고 선한 것이고 의로운 것입니다(12절).

문제는 율법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죄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문제는 율법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짧은 본문에서 “죄”라는 말을 10번이나 사용함으로써 문제가 죄에 있음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죄는 온 인류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죄는 강력하고 악독하며 집요하고 끈질깁니다. 죄(죄의 본성)는 율법이 주어지기 전이나 율법이 주어진 후나 우리 안에서 기회만 있으면 역사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합니다. 죄는 모든 경우에서 죄 지을 기회를 찾습니다. 죄는 심지어 율법까지도 죄 지을 기회로 삼습니다. 죄는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듣게 되면 그 율법을 이용해서 우리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일으킵니다(8절). 거듭 말하지만, 우리 속에서 탐심을 일으키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8절)이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마치 우리에게는 죄가 없는 것처럼 보이고 죽은 것처럼 보이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9절)라고 하였습니다. 전에 율법을 알지 못했을 때에는 우리에게는 아무 죄도 없는 줄 알았고, 그래서 우리 자신을 죽을 죄인으로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계명이 이르자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습니다(9절). 계명이 우리에게 오자 우리 안에 없는 것처럼(죽은 것처럼) 보였던 죄는 정체를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진단키트에 시약과 함께 검체물을 넣으면, 눈에 보이지 않던 바이러스가 드러나고(살아나고) 우리는 확진자로 선언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율법에 비추어보면 없는 것처럼(죽은 것처럼) 보였던 죄가 생생하게 드러나고(살아나고) 우리는 죄인으로 선언됩니다. 그래서 어떤 설교자는 율법을 “돋보기(확대경)”에 비유했습니다. 돋보기가 없을 때에는 작은 글씨나 먼지가 보이지 않다가도 돋보기를 통해서 보면 글씨가 생생하게 살아나고 먼지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율법이 우리에게 오면 우리에게 없던 것처럼 보였던 죄가 그 정체를 드러내고 그로 인해 우리는 죄인으로 선고되고 죄의 값인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10절). 율법 자체는 우리를 살릴 수는 없지만,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깨닫고 우리의 죄에 대해서 절망하게 만들어서 구원을 갈망하게 하고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된다는 점에서(갈 3:25), 율법은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마치 건강 검진 자체가 우리를 살릴 수는 없고 우리의 병을 드러나게 할 뿐이지만 우리의 건강과 생명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율법도 우리를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0절).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나를 죽였나니

그렇다면 이렇게 선한 계명이 어떻게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된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어지는 11절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11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바울 자신의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계명이 바울에게 왔을 때, 죄는 기회를 타서 계명을 가지고 바울을 속였습니다. 죄가 바울을 어떻게 속였습니까? 바울은 유대교에 있을 때에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행하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가지고 있었지만 죄에 속은 것입니다. 본래 율법은 우리를 살리고자 하는 좋은 뜻을 가지고 있지만, 죄는 그런 율법마저도 죄를 짓도록 하는 기회로 삼기도 하고 율법을 가지고 우리를 속여서 율법주의에 빠지게 함으로써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만듭니다. 율법은 우리를 살릴 수 없고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우리를 정죄해서, 결국에는 우리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율법이 우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인해 드러나게 된 “죄”가 우리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율법이 아니라 죄입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선하며 계명도 거룩하고 선합니다(12절). 율법은 좋은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깨닫고 우리가 죄인임을 알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복음의 중요한 부분을 알려줍니다. 또한 율법은 성화를 이루어 나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삶의 중요한 지침이 됩니다. 우리가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율법을 우리의 성화의 지침으로 삼고 있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 복음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몰고 온 것은 율법이 아닙니다. 율법은 선합니다. 선한 율법을 통해서 내 안에 죽음을 만들어낸 것은 바로 죄입니다. 계명을 통해서 죄는 그 정체를 드러내고 죄의 사악성(evilness)을 드러냅니다(13절). 율법은 모든 죄를 정죄하고 모든 죄인들을 향하여 사망을 선언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었고 율법의 정죄로부터 해방되었기에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안에서 죄의 기회를 찾지 못하게 하십시오. 죄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을 죽이지 않게 하십시오. 죄가 율법을 가지고 여러분을 속이지 않게 하십시오. 대신 율법에 비추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십시오. 또한 율법을 성화의 삶의 중요한 기준과 지침으로 삼고 살아가십시오. 우리의 성화를 위하여 율법을 제대로 바르게 사용하십시오. 이렇게 율법을 바르게 이해하고 율법의 복됨(blessedness)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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