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8:1-11
오늘 본문에는 가장 자주,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첫 번째 단어는 “영” 또는 “성령”이라는 단어입니다(헬라어로는 “프뉴마(πνεῦμα)”로 총 11번 사용됨). 두 번째 단어는 “육신”이라는 단어입니다(헬라어로는 “사륵스(σὰρξ)”로 총 10번 사용됨). 우리는 본문에 등장하는 “영(또는 성령)”과 “육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바르고 분명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신자의 성화에 관해 많은 혼란을 가지게 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육신(flesh, 사륵스)”은 인간의 “몸, 신체(body)”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된 본성(sinful nature)”을 의미합니다. 물론 성경에서 “사륵스”가 “몸(신체)”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지만(눅 24:39), 바울 서신에서 이 단어는 주로 인간의 죄된 본성을 의미합니다(갈 5:17 참조). 따라서 “육신을 좇는 자(5절), 육신에 있는 자(8,9절)”는 하나님이 없는 인생, 죄성의 지배 아래 있고 죄된 본성에 피동되어 사는,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 곧 비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창 6:3 참조). 이에 반해 “영(프뉴마)”은 삼위일체의 제 삼위이신 성령님(the Spirit)을 가리킵니다. “영을 좇는 자(5절), 영에 있는 자(9절)”는 성령을 받아서 성령의 보호와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 곧 거듭난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1-4절)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로마서 1-7장을 요약하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이 짧은 한 마디에 우리의 죄의 문제, 우리의 이신칭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관한 모든 내용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는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2절). “죄와 사망의 법”이란 율법을 가리킵니다(칼빈). 율법은 거룩하지만 율법은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결국 우리에게 사망을 선고하기 때문에 “죄와 사망의 법”이라 불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습니다. “성령의 법”이란 율법과는 다른 법인 은혜의 법, 생명의 법, 구원의 법, 곧 복음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시는 분이며, 이 생명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이 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 불립니다. 이 법은 율법이 연약하여 할 수 없었던 일을 능히 우리 가운데에서 해냅니다(3절). 율법 자체는 선한 것이지만, 율법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기에 역부족입니다. 이는 율법에 하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하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인해서(우리의 죄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인생들(육신) 안에 있는 죄를 정죄하시고 심판하셨습니다(3절).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시지만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likeness)”, 인성을 입고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in us, 우리 안에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4절) 하셨습니다. “요구”로 번역된 헬라어 “디카이오마”는 “요구, 계명”(롬 1:32), 또는 “의로운 행위”(롬 5:18), “옳은 행실”(계 19:18)을 의미합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의(義)와 순종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지만,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전가 받음으로써 우리 안에서 율법의 요구가 성취됩니다. 또한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할 때 우리는 (비록 율법에 완전하게 순종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율법의 요구에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겔 36:27).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5-8절)
육신을 좇아 사는 삶과 성령을 좇아 사는 삶, 육신의 생각과 성령의 생각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영(성령)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5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6절).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죄 지을 생각만 하고 죄 짓는 쪽으로 늘 기울어집니다. 육신의 생각은 결국 우리를 사망과 파멸로 끌고 갑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또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7절). 육신의 생각은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세상적이고 마귀적이기에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생각과 정반대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지도 않고 순종할 수도 없습니다(7절). 육신(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전적으로 무능합니다.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8절).
그러나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6절).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향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우리에게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고 순종의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생각을 주십니다. 이런 생각은 거듭난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소원과 생각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인해 늘 평안합니다. 이런 사람의 결국은 구원이고 생명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평안을 가져다주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11절)
그러므로 성령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성령님이 우리 속에 거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9절). “육신 안에(in the flesh)” 있느냐, “성령 안에(in the Spirit)”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 없으면 거듭남도 없고 믿음도 없고 그리스도와 연합도 없고 의롭다 하심도 없고 생명도 없고 평안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우리는 여전히 육신 안에 있는 자이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고 사망 아래 있는 자이며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즉,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면), 비록 우리의 몸은 죄로 인하여 죽겠지만, 성령님은 의를 인하여 생명이 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10절). 10절의 “영”을 신자들의 “영”으로 볼 것인지 “성령”으로 볼 것인지의 문제가 있습니다. 10절의 “영”을 신자들의 “영”으로 보아,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죽었던 영이 살아나게 된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결과적으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관찰하면 이 영도 역시 “성령”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칼빈, 존 머리, 더글라스 무). 개역한글 성경에서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 하신 구절의 문자적 해석은 “영은 의를 인한 생명이다”입니다. 헬라어 원문에 따르면 “산 것이니라”로 번역된 말은 동사(to live)나 형용사(alive)가 아니라 명사 “생명(life, 조에)”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인 영생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생명” 또는 “생명의 성령”(롬 8:2)이라고 불리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인하여”(10절)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시는 분입니다. 이어지는 11절도 “영”을 가리켜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라고 한 것을 보면 10절의 “영”은 성령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인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11절).
여러분은 육신 안에 있는 사람입니까, 성령 안에 있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평안을 가져다주시는 분입니다. 이 생명과 평안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풍성히 누리는 복된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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