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9:1-18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1-5절)
바울은 일평생 이방인 선교를 위해 수고하면서도, 그의 마음 한편에는 자기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을 인한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었습니다(1-2절). 이는 사도 바울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3절), 또는 “이스라엘 사람”(4절)이라고 불렀던 유대인들이 복음을 맹렬하게 거부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그의 사랑과 슬픔과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그는 차라리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짐으로써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모두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면 기꺼이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3절).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한편으로 안타깝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 가운데 가장 중심에 있던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었고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도 그들에게서 나셨습니다(4-5절). 이스라엘의 “양자됨”이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언약 백성으로 택하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 삼아주신 것을 의미합니다(출 4:22; 신 14:1-2; 사 63:16; 호 11:1). 또한 그들에게는 “영광”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시내산과 광야에서, 성막과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언약들과 약속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언약들과 약속들은 결국 죄인들을 구원하실 구원자를 보내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간의 죄와 비참을 알려주는 거룩한 “율법”도 주셨습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예배”가 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온갖 미신에 빠져 우상을 섬기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시고 예배하게 하셔서, 그들은 지상에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복된 민족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뿌리가 깊은 민족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육신으로 하면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5절)이신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민족에서 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원에 가까이 있었고, 그리스도를 믿을 만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복음을 거부했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이런 현실이 바울에게는 큰 근심과 고통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탄식하며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복음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말씀들은 다 폐하여진 것인가?”
오직 약속의 자녀만이 하나님의 자녀이다(6-13절)
그러나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바울은 곧바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개탄스러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셨던 말씀들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게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다 그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이다”(6-7절). 실제로 구약의 역사를 보면,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이라고 해서 모두 “이스라엘”에 포함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 말고도 하갈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이나, 그두라에게서 태어난 아들들도 있었습니다(창 25:1-6). 하지만 그들이 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불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오직 약속의 자녀였던)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라”(창 21:12)고 말씀하셨습니다(7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선택입니다.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으로 받은 자녀만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8-9절).
또한 약속의 자녀 이삭은 리브가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리브가는 이삭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여 쌍둥이 형제 에서와 야곱을 낳았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둘 다 이삭의 아들이었지만, 약속의 아들은 야곱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않았을 때에, 리브가에게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2절). 에서는 형이었고 야곱은 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이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선택으로 성립되는 일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11절).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말 1:2,3)고 하신 말씀의 뜻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13절).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렇게 이어져 온 것을 보니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낙망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폐하여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지금도 계속 성취되고 있습니다.
주권적인 은혜로 택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14-18절)
그러므로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14절).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 모든 일을 행하셨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불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14절). 누군가를 택하시고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는 일이지 사람에게 달려있는 일은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선택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구약의 두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먼저 모세의 경우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15절). 이것은 출애굽기 33:19의 인용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크게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셨을 때입니다(출 32장). 이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탄원하면서 하나님의 은총과 동행을 구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친히 동행하며 은총을 베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은총을 베풀어주실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하나님께 구하였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은총을 주시겠다고 거듭 약속하셨습니다(출 33:13-17). 하지만 모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께 다시 확실한 증거를 구하면서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겠다고 하시면서,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은총을 주시겠다고 하면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는 문제입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고 달음질하는 자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며,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16절)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바로의 경우입니다. 하나님은 바로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는 것이다”(17절). 이것은 출애굽기 9:16의 인용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시려고 불신자였던 바로를 왕으로 세우시고 그의 마음을 강퍅한 채로 남겨두심으로써,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원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기도 하시고 또 원하시는 자를 강퍅하게도 하시는 분입니다(18절).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나의 동족, 나의 형제, 나의 가족들이 구원을 얻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더욱 가집시다.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사실이 다른 이들의 영혼 구원에 대한 우리의 간절함과 거룩한 부담감을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우리와 우리의 가족들의 구원을 확인했다면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된 일임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깊이 감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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