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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병철 안

220925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롬 10:1-13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은 아님(1-4절)

바울은 유대인들의 구원을 누구보다 간절히 바랬습니다(1절). 유대인들은 대단한 종교적 열심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열심은 우상에게 대한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열심(zeal for God)”이었습니다(1절).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지식을 좇은 것은 아니었습니다(2절).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진리 지식에서 이탈하여 어둡고 우매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되어야 했지만, 유대인들은 유대교라고 하는 종교의 틀에 빠져 민족적, 정치적, 도덕적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관점을 따라 예수님을 판단함으로써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복음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지식이 없고 진리가 없는 열심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잘못된 사상이나 신념이나 종교에 빠져서 열심을 다해서 자신의 삶을 다 바쳐 살아가는 것은 보기만 해도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무지를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의에 대한 무지”라고 진단하였습니다(3절).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자기의 의를 스스로 세워보기 위하여 열중하였고, 그래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의에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의는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의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의라고 하였습니다(4절).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하여 의를 마련하여 주심으로 율법의 마침(τέλος, 완성, 성취)이 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4절).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율법의 모든 요구를 순종하심으로 율법의 그러한 요구를 완전하게 성취하시고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의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5-8절)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의를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 나누어서 설명하였습니다. 먼저 바울은 레위기 18:5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서 설명합니다(5절). 바울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율법의 요구를 완전하게 다 행함으로 이르게 되는 의”라고 설명하였습니다(5절). 하지만 죄인된 인간이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전하게 다 행하는 것이 실현불가능한 일임을 바울은 이미 선언하였습니다(롬 3:20). 율법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다 지켜 행함으로 의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우리에게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6절)고 말합니다. 이는 신명기 30:12의 인용입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가 율법의 내용을 다시 한 번 더 자세하게 설명하며 가르친 내용을 기록한 책입니다. 모세는 긴 강론을 마무리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신 30:2)할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모세의 설교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대로 사는 것은 너무 어렵다.”고 하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이 명령은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며 바다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11-14)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한 것은, 율법을 받았을 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복음에 대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자들에게 경고를 보내기 위함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의에 이르게 된다고 하는 복음을 믿기 어려워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불신하고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6절)과 같았습니다. 즉,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은 마치 하늘로 올라가신 그리스도가 있다면 그를 다시 데리고 와보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7절)고 말합니다. 이 역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우리를 위하여 부활하셨다는 복음의 선언에 대한 불신과 조롱의 말이었습니다. 이는 결국 복음에 대한 총체적인 불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설교하는) 믿음의 말씀이라”(8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사도들이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이 “사도적 복음”이 우리 가까이, 곧 우리 입에 있고 우리 마음에 있으니 이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에 이르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의에 대해 무지한 채 율법에서 생명을 얻는 줄을 알고 율법을 행함으로 의에 이르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이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 곧 복음을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9-13절)

이제 사도 바울은 어떻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이를 수 있는지를 자기 동족 유대인들을 향해 다시 한 번 설명합니다.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9절). “우리의 입으로 예수님을 주(the Lord)라 시인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는 것”은 믿음이라고 하는 하나의 사건에 수반되는 두 현상입니다. 믿음은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 모두를 수반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과 우리의 입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것 둘 다를 수반하는 것처럼,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것과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는 것은 믿음이라고 하는 하나의 사건에 수반되는 두 현상입니다. 우리의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9,10절)과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12,13절)은 우리의 마음으로 믿는 바를 확인하고 천명하는 행위입니다.


사도 바울은 참된 믿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고 선언하였습니다(11,13절). “누구든지”입니다. 여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12절). 누구든지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에 이르고 구원에 이르고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11절)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거듭 인용하고 있습니다(롬 9:33 참조).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말은 결국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의에 이른다는 말이다 구원에 이른다는 말이나 결국에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구원을 이르는 말입니다. 율법을 행함으로는 우리가 결코 의에 이를 수가 없고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만 의에 이르고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9-11절).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십니다(12절).

그러므로 바른 진리 지식을 따라서 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열심을 내는 것은 가장 치명적이고 위험한 것입니다. 복음은 어려운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말씀(사도적 복음)을 우리 가까이, 곧 우리 입에 두시고 우리 마음에 두시고 우리 귀에 들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으십시오. 누구든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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