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2:9-13
신자가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는 신자로서의 자기 이해가 분명해야 합니다. 신자는 거룩하고 아름다우신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들입니다. 따라서 신자들의 인격과 삶에는 세상과는 구별되는 거룩하고 아름답고 고매한 어떤 것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신자의 아름다운 자태”이고, 그것이 “신자다운 모습”입니다. 신자의 아름다운 자태는 신자들의 인격과 삶에서 드러나야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발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나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나지 않는 경건은 허상에 불과합니다.
신자의 아름다운 자태- 거짓이 없는 사랑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언급한 후에(3-8절),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9절) 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왜 갑자기 “사랑”을 언급한 것입니까? 왜냐하면 “사랑”은 신자에게 가장 신자다운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의 가장 핵심입니다.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둘로 요약됩니다(마 22:40).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은 십계명의 첫 번째 돌판인 제1-4계명으로 요약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은 십계명의 둘째 돌판인 제5-10계명으로 요약됩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신자의 이웃 사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우리의 이웃은 신자와 불신자,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웃 사랑은 신자들과의 관계와(9-13절) 불신자들과의 관계에서(14-21절) 발휘되어야 합니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라고 번역된 문구는 마침표를 가진 하나의 독립된 문구 또는 문장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사랑은 거짓이 없다”로 번역될 수도 있고, “거짓이 없는 사랑”으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거짓이 없다”로 번역된 헬라어(ἀνυπόκριτος)는 “가식이나 위선이 없는(without hypocrisy), 진정한(genuine)”이라는 뜻의 형용사입니다. 그리고 9절의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는 성경에서 주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로마서에서도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지만(롬 5:5, 8; 8:35, 39), 오늘 본문에서 아가페는 신자에 의해 발휘되어야 하는 사랑을 묘사하는 데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랑은 가장 신자다운 모습이며, 신자의 아름다운 자태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받은 신자는 그 사랑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거짓이 없는 사랑의 열두 가지 특징
그렇다면 신자의 아름다운 자태인 “거짓이 없는 사랑”은 어떤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일련의 명령문으로 번역되어 있는 9절 중반절부터 13절까지는 사실 헬라어 원문에는 일련의 분사구문으로, “거짓이 없는 사랑”을 묘사하는 일종의 주석으로 이해됩니다(크랜필드).
첫째, 이 사랑을 가진 신자는 악을 미워하고 혐오합니다(9절). 참된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악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악을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 사랑을 가진 신자는 선을 추구하고 선을 고수합니다(9절). 참된 선은 하나님의 뜻에 합한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모든 일을 참된 믿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과의 관계가 악으로 얼룩지지 않고 선으로 장식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셋째, 이 사랑을 가진 신자는 다른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합니다(10절). 자기 형제를 사랑하듯 형제애로 서로를 깊이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같은 사랑을 받아서 이제 한 몸의 지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하는 사람입니다(요일 4:20).
넷째, 이 사랑을 가진 신자는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합니다(10절). 이는 상대방의 명예를 서로 먼저 생각한다는 말입니다(10절).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높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짓밟지만, 신자는 다른 지체들에게 그렇게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처럼 주신 다른 지체들을 소중히 여기면서 서로의 명예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다섯째, 이 사랑을 가진 신자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습니다(11절). 사랑은 게으름 피우지 않는 부지런함입니다. “게으른 사랑” 같은 것은 없습니다. 사랑은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그리고 다른 지체들을 위해서 부지런한 것입니다. 게으름과 나태함은 죄의 온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부지런함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여섯째, 이 사랑을 가진 신자는 열심을 품습니다(11절). 열심을 품는다는 말은 성령으로 뜨거워지는 것을 말합니다(칼빈, 존 머리). 진정한 사랑은 인간적인 열심이나 다른 무엇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뜨겁고 간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에게 사로잡혀 열심을 내는 것은 신자의 아름다운 자태 중 하나입니다.
일곱째, 이 사랑을 가진 신자는 주님을 섬깁니다(11절). 주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가정과 직장과 사회와 교회에 두시고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와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그리고 다른 지체들의 복과 유익을 위하여 우리 각자에게 맡겨주신 일을 잘 하는 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특별히 예배와 양육과 전도와 봉사의 일들이 중요하게 포함됩니다.
여덟째, 이 사랑을 가진 신자는 소망 중에 즐거워합니다(12절).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고전 13:7). 신자는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믿기 때문에, 어떤 형편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소망 중에 즐거워합니다. 신자는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시 62:5) 사람입니다. 우리의 소망이 그에게서 나옵니다(시 62:5; 잠 10:28 참조).
아홉째, 이 사랑을 가진 신자는 환란 중에서 인내합니다(12절). 주님을 참되게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보내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여 주신 것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것을 생각하면서 환란 중에서도 견디고 인내합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벧전 3:19)고 하셨습니다.
열째, 이 사랑은 멈추지 않는 기도로 입증됩니다(12절).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모습이야말로 신자의 아름다운 자태입니다.
열한째 이 사랑은 성도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13절).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일에는 익숙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에는 서투릅니다. 우리는 지체된 다른 성도들의 필요(물질적, 정서적, 영적)를 보았을 때,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채워주고자 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 사랑입니다(요일 3:17-18).
열두째, 이 사랑은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초대교회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많은 순회 설교자들과 전도자들이 있었고, 또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나그네가 된 성도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환대하고 대접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아름다운 자태입니다. 이러한 신자의 아름다운 자태가 나에게 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ㅅ봅시다. 악을 혐오하고 선을 고수하며, 서로 형제같이 우애하고 서로의 명예를 먼저 생각하고,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며,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고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는, 이러한 신자의 아름다운 자태가 우리 가운데 꽃 피고 열매 맺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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