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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병철 안

230709 잃었다가 얻은 아들로 인한 아버지의 기쁨(김병훈 목사)

최종 수정일: 2023년 7월 22일

눅 15:11-32


오늘 본문은 “탕자의 비유”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본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하시고 그들과 함께 식사하시며 죄인들을 영접하시는 예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멀리 있는 자들이요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되는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올 때, 주님께서는 그들을 환영해 주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가까이에서 그 모습을 보았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이 옳다고 동의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은 당시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타락한 인간의 중심적인 질문입니다. 과연 누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입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의인이고, 바로 자신들이 그런 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 세리와 죄인들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5:1-2에서 예수님께서 그런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시고 함께 식사를 하시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충격과 혼란에 빠져 원망하고 수군거렸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세 가지 비유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이 수군거림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방탕한 둘째 아들

탕자의 비유에는 세 명의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둘째 아들과 아버지, 그리고 첫째 아들입니다. 먼저 둘째 아들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둘째 아들은 탕자, 곧 방탕한 자식입니다. 그는 아버지께 가서 자기 몫의 유산을 요구합니다(12절). 유산은 자녀가 권리를 주장하며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에서 비롯되는 은혜일 뿐입니다. 그러나 탕자는 아버지가 생전에 계실 때 이 유산을 요구함으로, 자신이 아버지를 공경하는 마음에서 멀리 떠나 죄 가운데 있음을 드러냈습니다. 또한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허비함으로(13절), 자기의 정욕에 따라 원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악한 동기로 유산을 요구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재산을 다 허비한 후에, “하필이면” 그때 그 나라에 흉년이 듭니다(14절).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십니다. 흉년으로 인해 탕자는 죄로 인한 비참함을 처절하게 맛봅니다(16절). 하나님께서 탕자를 극한 상황으로 밀어 넣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극한 상황에서 탕자는 자신의 비참을 탄식하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버지의 집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도(17절) 동시에 자신이 하나님과 아버지께 범죄하였기 때문에(18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인정받을 수 없는 자라고(19절) 고백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신자로 살면서 죄 중에 거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징계하셔서 깨우치고 돌이키게 하시는데, 그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시고 믿음으로 붙들게 하십니다. 결국 둘째 아들의 결론은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지만 아들의 자격은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

이제 아버지를 보겠습니다. 20절을 보면 아버지가 놀라운 반응을 보이십니다. 가까이서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몰골이 흉하고 행색이 초라한 아들을, 아버지는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보고 달려가 안아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알아보십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신앙의 자태를 가지고 있을 때뿐만 아니라 죄와 연약함으로 비참 가운데 있을 때에도 아버지는 알아보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달려와 맞아 주시고 목을 안고 입을 맞춰 주십니다. 이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복된 장면인 동시에, 타락한 인간이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랑과 용서는 부패한 인간의 본성에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비유 속에 아버지는 우리가 경험한 아버지와는 너무나도 다릅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깁니다(22절). 혹시라도 아들이 손가락질을 당할까봐 아들의 신분을 즉시 회복시켜 주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여 돌아온 아들에 대한 기쁨이 얼마나 큰지 보여줍니다(23절). 이 기쁨의 이유는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는 말씀으로 설명됩니다(24절). 이것이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크고 거룩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와 관계하실 때는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비롯된 언약 안에서 우리에게 더없는 아버지로 다가오십니다. 오늘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보여준 모습이 이 사실을 잘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언약 안에서 자녀 삼아주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와 허물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사랑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 눈물의 엎드림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십니다.

첫째 아들의 분노

첫째 아들의 반응은 아버지와 달랐습니다. 일하고 돌아와보니 잔치가 열려 있어 무슨 일인가 물어보았더니(25-26절), 방탕했던 동생이 돌아와서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열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27절). 이에 첫째 아들은 화를 내며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28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을 위해서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여는 것은 부당하고 불공평한 것이라며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30절). 첫째 아들의 생각에 둘째 아들은 도무지 아들로 받아들여줄 만한 자격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에게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라"(31절)고 말씀합니다. “네가 받기로 되어 있는 유산은 네 몫으로 그대로 있으니 아버지가 공의롭지 않다며 화를 낼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첫째 아들의 불평은 포도원 품꾼 비유(마 20:1-16)에서 종일 수고하고 일한 자가 나중에 일하러 온 자와 같은 품삯을 받게 되자, 주인에게 불공평하다고 따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불평을 하며 이렇게 질문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별로 다르지 않은데, 어떻게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의 대답도 동일할 것입니다. 세상은 첫째 아들처럼 그 이유를 모릅니다. 우리가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 모두 아버지의 아들 됨에 있어서 ‘자격’을 생각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나는 자격이 없으니 아들이 아닌 품꾼이라”고 생각하고, 첫째 아들은 “나만큼 자격 있는 아들이 어디 있느냐?”며 자신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우리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주님께 가까이 나아오면 영접해 주시고,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나아오면 아무리 죄인 중의 죄인이라 할지라도 자격을 묻지 않으시고 그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 5:8).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을 보시고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여전히 죄인 되었을 때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세상이 이 복된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때때로 우리도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처럼 주님께 나아오지만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아들 됨의 기쁨을 잃어버린 자처럼 살기도 하고, 첫째 아들처럼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거나 판단하면서 스스로를 우월한 신자요 자격 있는 신자라 내세우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모습들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아버지의 사랑이 절실하고 유일한 구원의 근거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새겨야 합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고 말씀하신 그 주님께서 또한 우리를 불러주셨으니 그 은혜를 찬송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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