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를 떠나셨던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 동쪽 감람산 가까이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 두 사람에게 특별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둘을 보내시면서 ‘맞은편 마을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이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볼 것인데 그것을 풀어 끌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일 누가 제자들에게 왜 나귀 새끼 매여 있는 것을 푸느냐고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일러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은 “주께서 쓰시겠다” 말하며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또 어떤 사람들은 밭에서 자른 나뭇가지를 길에 깔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을 맞이하였습니다. 또 감람산 내리막길에 이르렀을 때 모든 제자들의 무리들은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러 가지 질문들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풀어오라고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입니까? 사람들은 왜 예수님이 들어가시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까? 사람들이 부른 찬송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또 바리새인들은 왜 예수님께 하나님을 찬송하던 제자들을 책망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귀 새끼를 끌어 오게 하시고 그것을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보내기로 약속하신 왕이신 것을 밝히시는 행동이었습니다.
야곱은 병상에서 하나님의 영의 감동하심을 받아 장차 오실 메시아 왕에 대해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창 49:10-11) 야곱은 유다 지파에서 태어날 한 왕에 대해 예언하였습니다. 특별히 그 왕을 위해 준비된 나귀와 나귀 새끼를 말한 바 있습니다. 장차 오실 왕을 위한 나귀 새끼가 있으며, 나무에 묶여 있는 나귀를 풀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너라 하신 것은 자신이 선지자 야곱이 예언했던 유다 지파에서 태어날 왕이심을 성취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누가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푸느냐’라고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대답하게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제자들은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라고 묻는 나귀 주인들에게 “주께서 쓰시겠다”고 대답한 후 나귀를 예수님께로 끌어 옵니다. 이것은 왕이신 예수님께서 그 나귀들에 대한 소유권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구약시대 스가랴 선지자는 오실 메시아에 대해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의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슥 10:9-10) 예수님께서는 그의 예루살렘 입성이 선지자의 이 예언을 이루는 것임을 밝히고자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제자들의 찬송 중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입성하시는 것임을 밝히고자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입성은 이방 나라의 왕들처럼 어떤 위엄 있는 군마와 병거를 타고 많은 부하 장수들과 군대를 거느리는 그런 입성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인간적으로는 초라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입성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 임금들과 다른 모습으로 입성하시는 것을 통해 주님과 주님께서 가져오실 그 나라가 이 세상 나라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진 나라인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 장면을 예언하면서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의 새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왕이신 예수님의 다스림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세상의 왕들은 칼과 창으로, 무력과 공포로 평화를 유지합니다. 그러하기에 백성들의 마음으로부터의 순종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이 사용하는 폭력이 원한을 쌓습니다. 그러다 더 큰 전쟁과 살육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온유하고 겸손한 왕이십니다. 폭력과 두려움을 통해서가 아니라 겸손과 온유함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정복하시고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모든 폭력적인 전쟁을 끊으실 것입니다.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열국에 평화를 전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평강의 왕의 입성을 모든 제자들은 그 옷을 길에 펴고 종려 나뭇가지를 꺾어 들고 환영하였으며 이런 왕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들은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외친 이 찬송은 시편 118편을 인용한 내용입니다. 시편 118편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26절), 메시아를 바라보면서 찬송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에서 환난 가운데 있는 백성을 구원할 왕께서 겪을 뜻밖의 일에 대해 말씀합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시 118:22-23) 건축자에 의해 버려진 돌처럼 잠시 버려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건축자는 누구보다도 어떤 돌이 어떤 곳에 쓰여야 하는지, 그 가치와 용도를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건축자가 쓸모 없다고 버린 돌을 하나님께서 건물 전체를 떠받치는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아 건물을 세우셨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맡기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배척하고 부인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교회의 기초석이 되게 하셨음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치 않고 부인하여 배척하였고, 하나님을 훼방한 자라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버림받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손에 넘기워져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써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심으로써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그 걸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참 평화를 가져다주실 왕의 입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시편 118편을 인용하여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으로 환영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듣던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내용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제자들을 책망하여 이 일을 중단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누구보다도 말씀을 많이 알면서도, 또 구약성경을 통해 예언하신 일이 지금 그들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제자들이 하는 일이 옳으며, 그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고 있음을 확인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왕이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 평화를 가져다주시는 평강의 왕이십니다. 그분은 세상 왕들처럼 폭력과 공포로써가 아니라 겸손함과 온유하심으로 자기 백성의 마음을 정복하고 다스리시며 평화를 주십니다. 특별히 건축자들에 의해 버림 받으시지만, 하나님께서 모퉁이의 머릿돌 되게 하셔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써 그 일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하시어 나귀새끼를 타신 이 왕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왕이심을 밝히시는 동시에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분임을 알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다 그분께로 나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7-29)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우리는 믿음으로 담대히 구주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겸손하신 왕을 목도한 우리는 제자들과 같이 그리스도를 높이고 하나님을 찬양함이 마땅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인해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 사람들이 잠잠하다면 돌들이라도 소리쳐 찬양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모든 영광과 존귀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지극히 높고 거룩하신 분께서 저와 여러분 같은 죄인을 위해 지극히 낮고 비천한 지위에 나시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으니 이분께 찬송함이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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